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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06. 2024

동굴 밖의 차라투스트라 (3단계: 신념완성체의 시절)

인프제INFJ는 진화한다





1.
차라투스트라는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자신의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 속에서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면서 보내기를 십 년, 그런데도 그는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마음에 변화가 왔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태양을 행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주고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나는 베풀어주고 싶고 나누어주고 싶다.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롭다는 자들이 세삼스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가난한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의 부유함을 기뻐할 때까지.
그러기 위해 나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네가 저녁마다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하계에 빛을 가져다줄 때 그러하듯, 너 넘치도록 부유한 천체여!...
보라! 잔은 다시 비워지고자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사람이 되고자 하니."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역, 책세상


시끄럽던 내부가 조용해졌다. 차라투스트라처럼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차라투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어둠의 동굴에서 나오기까지 딱 10년이 걸렸다. 고독의 바닥으로 내려가서 쓰고 또 썼다.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혜는 단순했다. 지혜는 내 안에도, 외부에도 없었다. 지혜는 너와 나, 그 사이 어디쯤 흐르는 그 무엇이었다.




정체

정답 없는 삶에서 정답을 찾으려니 힘들었다. 실체 없는 존재에게 정체를 물으니 대답할 수 없었다. 기억이 정체성이다. 과거를 붙들고 늘어졌다. 과거를 묻고 대답하고 썼다. 삭제되고 왜곡된 기억들의 이유를 물었더니 여리고 불쌍한 어린 '나'가 울고 있다. 왜 그토록 나는 스스로에게 가혹했을까?


자기를 객관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의심했다. 자기 부정에서부터 자기 부정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반복된 부정의 끝, 맨 밑바닥에 진짜 '나'가 남았다.


자기애는 수치가 아니다. 자기를 긍정하기 위해 부정한다. 자기 부정은 나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부정 또한 부끄러움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순서의 문제일 뿐이다. 처절한 자기 부정 뒤에 순정하게 남은 자기애와 만나기 위해서다. 역순은 나르시스의 자기 파멸일 뿐이니 나는 이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나의 부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기 부정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부정을 사랑하다 보면 사랑은 변환점을 맞이할 것이고 그 사랑은 타인에게 흐를 것이다.




작가

나는 왜 작가가 되려고 하는가? 이유를 댈 수 없는 사랑이 진짜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이유 앞에 나는 언제나 대답을 망설인다. 글을 써서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내 욕망의 기원은 멀고도 깊다. 내가 글쓰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글쓰기가 나를 선택했다. 그렇게 정해진 길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다. 험하고 먼 길을 길게 돌아왔다. 느리지만 단단하게 딛고 지나온 길이 나의 길이었다.


'작가'보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편안하다. 현재 직업적 정체성이 작가보다는 교사에 있다. 인프체INFJ 특유의 변화에 대한 직감을 감지한다. 교사에서 작가로의 이행. 교사라는 직업이 작가로의 이행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면서 숨기고 싶었다. 가르침, 도덕과 교훈, 당위와 순응에 길들여진 자라는 혐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자신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교사 집단 안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내 언어에 체해서 헐떡거렸다.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어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여러 형태로 바꿔나가는 게 작가가 하는 일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했다. 작가로서 앞으로 내가 쓰게 될 이야기가 무엇이 될 지 힌트를 얻는다. 발설하지 못한 체기의 언어들과 뒹굴게 될 것이다. 나는 쓰면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아니다, 두려움이 사라져서 못 쓸 것이 없어졌다. 작가가 된다는 건 나를 위한 글쓰기를 멈춘다는 뜻이다. 나의 글이 타인에게로 잔잔하게 스며들기를 바란다.




가치

내 글쓰기는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깊게 이어가는 실용적 목적으로 활용된다. 말과 글의 간극이 엄연히 존재한다. 말과 글 사이의 간극에 시간과 공간이 끼어든다. 말의 현장성과 즉시성은 속도 면에서 장점이 있지만, 깊이 면에서 한계가 있다. 글은 말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나는 당신의 내면을 알아요."  

올해는 학생 글쓰기반 말고, 교사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다. 가르침의 글쓰기에서 공유의 글쓰기로 변화를 꾀했다. 글을 써서 말을 걸고, 글로서 상대를 알게 되는 깊이가 있다. 일종의 사고 실험이면서 행위의 실천이다. 타인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에는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훈련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 훈련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를 공유하면서 타인의 가치와 추상세계에 한 걸음 다가간다. 이런 방법으로 친구를 만들었다. 성별, 나이, 가치관을 넘어 친구의 범위가 넓어졌다.


글쓰기로 사람과 사람이 더 넓고 깊게 연결되기를 고민하고 있다. 인프제INFJ 특유의 이상주의가 글쓰기에도 발동한다. 내 글쓰기가 불특정 독자로 나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 삶의 가치가 '속도'에서 '과정'으로 바뀌면서 조급과 불안이 사라졌다.    


"여보, 카페만 즐비한 우리 동네 가로수 거리를 책방 문화거리로 만들어 버리자. 10년 걸리겠지."

"당신이 가진 넓이와 내가 가진 깊이로 사람들에게 소소하게 선한 영향력을 나누면서 늙어가자."

아내와 이런 말을 주고 받을 때면 삶이 충만해짐을 느낀다. 우리 부부의 언어는 확신적이다.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리며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기에 확신적 행위의 언어로 현재를 살고 있다.  




징조(조짐)
"동정(연민의 정)이다! 차원 높은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청동빛으로 변했다. "좋다!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나의 고통과 나의 동정,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내가 행복을 얻으려 애쓰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는 나의 과업을 위해 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자! 사자가 왔다. 나의 아이들도 가까이 있다. 차라투스투라는 성숙했다. 나의 때가 왔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자, 솟아오르라, 솟아오르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어두운 산위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타오르며 힘차게 그의 동굴을 떠났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한다'는 이로써 끝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역, 민음사. (정동호역, 책세상)


나는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왔다. 용맹한 사자의 시절을 지나, 아이가 되려고 한다. 아이를 가르치는 '어쩌다 어른'이 아니라,  평생 '진짜 아이'였던 적이 없었던, '이제서야 아이'가 된다. 단단하게 완성된 나의 언어를 가지고 나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나의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찬란한 아침 태양을 맞이하고 위대한 정오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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