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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05. 2024

암흑의 동굴 (2단계: 자기해체의 시절)

인프제INFJ는 진화한다





이 시기는 몸의 몰락으로부터 시작됐다. 펄펄 끓어 날뛰는 정신이 몸을 방치했다. 자신감에 넘쳤던 신념은 오만으로 판명났고, 정신은 몸에 처절하게 무릎을 꿇었다. 다시 내면으로 돌아왔다. 마음은 바닥으로 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추락의 바닥 끝에 죽음이 있었다. 비로소 타인의 죽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긴 우울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암

위 전체가 허망하게 잘려 나갔다. 저장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허겁지겁 주변을 마구 집어삼키던 욕망에 제동이 걸렸다. 앞을 향해 내달리던 생활의 속도가 느려졌고, 쉼표가 필요했다.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자, 그 동안 보지 못한 길가에 핀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항암 치료는 몸을 서서히 몰락시켰다. 지금까지 나의 장점이라 알았던 초공감 능력은 위선이 아니었던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약자 편이라고 믿었지만, 자신이 약자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에게 기댈 수밖에 없게 되면서 사랑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 했다. 천천히 진행된 몸의 몰락은 오히려 혼란하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켰다.


날카로운 메쓰의 충격은 모든 것을 선명하게 했다. 복부 한가운데를 선명하게 가른 칼자국의 흉터와 영원히 복구되지 않는 위장의 빈 자리가 대충 망각으로 퉁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고마운 일이었다. 살아 있는 한, 통증의 시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명령이었다. 생활의 속도가 빨라지면 몸이 멈추라고 말하고, 마음이 혼탁해지면 몸이 조용히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몸을 가장 신뢰하게 되었다.  




죽음

자기 죽음에 대한 인식은 피상적이고 추상이었다.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지인들이 다시 떠올랐고, 암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지인을 보기도 했다. 암의 발병은 내게 처음으로 죽음을 삶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죽음이 삶 안으로 끌려 들어오자 삶의 의미들이 선명해졌다. 삶에 대한 용기가 솟아났지만 두려움은 여전했다. 용기와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했다. 죽음 앞에선 삶의 모든 행위들이 무용하다는 허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반대로 죽음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해서는 안된다는 삶의 애착이 생겨나기도 했다. 눈치볼 것도 없고,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살아있는 동안 자기 해보고 싶은 것 못해 보고 죽는 것만큼 어리석은 삶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용기가 솟았다. 죽음이 가르쳐준 용기가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뭘 하든 당신의 선택은 옳은 것이니, 믿고 가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죽음'이란 단어가 금기어에서 봉인 해제된 것은 큰 선물이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금기와 회피에 있었다. 발설할 수 있게 되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울

죽음의 시간을 헤쳐나오자 잔인한 우울의 봄이 찾아왔다. 삶은 언제나 미궁이었고, 죽음은 공포였다. 황량한 죽음의 겨울을 지나온 자만이 느끼는 긴장감 빠진 안락. 그 편안함 속에 깊이 쟁여놓은 언젠가 다시 찾아올 죽음의 공포. 그 사이에 잔잔히 고여 있는 공허. 그리고 공허한 재생의 삶이 주는 반복이 나를 우울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나에게 봄이란 언제나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계절이었다. 꽃 지는 게 두려워 꽃 피는 봄을 오롯이 즐기지 못했다.


정확한 좌표가 없는 공허 속을 헤맸고, 몸이 또 다른 이상신호를 보내왔다. 뇌파 교란,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뇌파의 동기화 현상, 뇌전증이 찾아왔다. 각자 다르게 세팅되어 흘러야 할 뇌파가 원인 모르게 같아져 쇼크를 일으킨 것이다. 각자가 가진 고유의 주파수대로 뇌파가 불규칙하게 흘러야 균형이 맞는 상태다. 불완전한 상태를 견디는 내성이 내게는 없었을까? 안정된 상태로 돌려놓으려는 욕심이 지나쳐 상황을 망쳐 놓았다. 나는 여전히 욕망과 집착의 덩어리였다.  


기억이 상실되는 경험은 또다른 공포였다. 그래서 기록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내 글쓰기의 기원은 오래 되었지만, 중년에 다시 고개를 처든 기록과 쓰기는 집착에 가까웠다. 아이러니 하게도 쓰기로 인해 이완의 시간이 찾아왔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다시 읽고, 쓰면서 마음이 하는 소리를 솔직하게 받아 적는 나만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마음과 밀착할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둠으로써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겨났다. 쓰기는 자기자신과의 밀착이 아니라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이미 작가의 길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프제INFJ형 인간이 가야할 길로 수렴하고 있었다. 이렇게 '암흑의 동굴'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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