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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04. 2024

실패한 항해 (1단계: 초공감의 시절)

인프제INFJ는 진화한다





이 시기는 불협하고 있는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시선은 외부로 향해 있었다. 정작 나는 속이 빈 강정 상태인지도 모르고, 타인에게 공감하려고 애를 썼다. 공감은 말 그대로 '공허한 감정'의 소모였다. 내 감정을 공유할 누군가를 찾아 헤맸고, 비슷한 누군가를 찾으면 기댔다가 실망하고 떠나고, 다시 누군가를 찾고... 나는 감정 유목민이었다. 항상 공허감을 느꼈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가족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서 가족들에게 나는 조용하고 착한 아이였다. 관심의 영역 밖에서 방치되다가 숨길 수 없는 내면의 가시가 가끔씩 삐죽삐죽 튀어 나올 때 가족들은 화들짝 놀라서 물러났다. 까탈스럽고 고집 센 아이였다. 무엇을 품었는지 몰라서 가까이 했다가는 다칠 수 있는 위험한 아이였다. 가족들은 그 가시가 튀어나오지 않게 조심했다.


엄격한 내 도덕적 기준에서 가장 벗어난 사람은 아버지였다. 가족을 포기하지 않는 책임감 강한 가장이었지만, 술주정과 폭력이 그 장점들을 모두 덮어 버렸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지 않았다. 내안에서 아버지를 완전하게 무시하고 배제하는 방법으로 저항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내 에너지의 동력이었다. 가족 내에서 아버지의 고립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고, 나는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의지할 기둥은 어머니였지만, 어머니한테서 벗어나야 한다고 무의식은 끊임없이 외쳤다. 갈등과 모순으로 내안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존재하지만 내 안에서 지워버린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에게 강하게 의존하고 밀착했다. 어머니에게 심리적 동조자는 나였지만, 심리적 의지자는 딸인 누나였다.(그땐 몰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갈등했지만, 아버지에게 기댔다. 다섯 살 아래 남자 동생은 놀이 상대이자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동생의 보호자를 자처했지만, 내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어린 백성이기도 했다.  




타인

나는 깊고 완벽한 관계에 집착했다. 제대로 된 연애는 시작도 못해보고 실패했다. 관계에서마저도 완벽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성향은 걸림돌이었다. 그 시절엔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고 예민한 심미주의자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가왔다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이런 나를 이해 못해 나는 다가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늘 사람들 주위를 뱅뱅도는 주변인이었다.


이 시기의 한 가운데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가장 깊은 나의 통증이었다. 아내는 그때까지 내가 옳다고 믿었던 도덕의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았다. 아내에게서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지금까지 써오던 회피의 방법은 더이상 통하지 않았다. 회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좁은 틈 사이로 늪의 진흙이 채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을 빼고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나는 사랑에 주체적이지 못하고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순한 양이었다. 그 감정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동지애인지 알지 못한 채 휩쓸리 듯 아내의 에너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지나치게 솔직한 아내의 감정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충실했다. 그 에너지에 나는 압도 당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우리는 주변에 환영받지 못하는 커플이었다. 나를 아는 주변인들은 아내를 싫어했고, 아내를 아는 주변인들은 나를 싫어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내였기에 우린 결혼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와도 조합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나는 아내가 아니었다면 조합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우스겟 소리로 자주 하는 말이지만, 맞는 말이다.




학생

교사의 길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 시절 내 시선 안에는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아이들에게 있었다. 나는 이상주의자였고, 나아가야할  길을 힘겹게 개척하는 보람으로 살았다. 나는 보람의 아드레날린 중독 상태였다. 교사라면 학생들과 밀착해 뒹굴어야 한다며 15년을 한 해도 쉬지 않고 담임을 했다. 일에는 완벽주의자였고, 내가 정한 기준은 필요 이상으로 높았다.


내가 가진 공감 능력은 교사에게 필요한 덕목이었고 직업적 만족감을 주었다. 주위 사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나만의 '공감 업무'를 은밀하고 치밀하게 수행했다. 누군가가 인정해 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스스로를 밀어 붙였다. 이상은 언제까지나 이상일 뿐, 쫓아가면 갈수록 더 멀어지는 행복의 파랑새였다.


그 시절 나는 엠패스(초공감자)였다. 감정은 길어내고 길어내어 써도 마르지 않는 우물인 줄 알았다. 깨끗하고 투명한 우물에 비치는 자기를 사랑한 나르시스였다. 감정의 우물은 영원하지 않았다. 자아도취형 공감의 댓가는 혹독했다. 나는 나르시스를 사랑한 에코이기도 했다.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을 따라할 수밖에 없는 형벌을 받은 에코. 내안에서 풀어내지 못한 무수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지만,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가련한 에코였다. 내면은 허방다리를 딛고 있는데 타인에게 공감하려는 미련한 사랑이 나를 파괴했다.


번~ 아웃!

위암이 교통사고처럼 어느 날 훅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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