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
나는 MBTI를 불신한다. MBTI는 20여 년 전(2000년대 초) 이미 교원 연수 판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었다. 그 이전에 MBTI가 한국에 소개된 건 1990년대 초였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44년, 마이어와 브릭스 모녀가 계발했고, 이론적 기반은 1900년대 초, 카를 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프로이트와 융이 우리에게 알려 준 인간의 마음에 관한 독특한 통찰과 영감을 사랑한다. 20년 전 그때도, 지금도, 나는 성격유형검사에 무관심한 건 변함이 없다. 지금은 MBTI 전문가가 너무 많고, 더이상 아는 게 없는 나('인프제INFJ'의 특징 밖에 아는 게 없다)는 전문적 얘기는 더 할 게 없어 여기까지.
개인은 다원적이다. 인간의 마음을 과학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심리학心理學을 나는 '악마의 학문'이라고 여겼다. '마음의 이치'를 연구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오만이다. 인간의 마음은 수치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다. 수치와 실험은 객관성을 확보했다는 도구적 트릭이다. 본질적으로 마음은 주관성의 영역에 속해 있다. 마음을 단순하게 묶으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심리학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런데 끌린다. 악마에게 더 매혹당하는 인간의 알 수 없는 심리.
심리학의 매혹은 '예언'에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하는 부유하는 인간에게 심리학은 어설프게나마 가상의 좌표를 찍어준다. 가상의 좌표가 있어야 비로소 인간은 예측이 가능해진다. 심리학의 예언에 인간은 안도감을 느낀다. 나는 과학자 쪽이라기보다는 인문학자 쪽이다. '공식과 틀'에 알레르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을 흘깃거리는 것은 예언적 통찰을 즐기기 때문이다.
이해
'나는 누구인가?'를 평생 질문하며 살았다. 도무지 잠재워지지 않는 내 안의 혼란과, 전쟁을 치르 듯 살아왔다. "너, 참 피곤하게 산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도 아는데, 이게 나인 걸 그럼 어떡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을 바쳤다. 그때는 그렇게 '바쳐진 시간'을 소모라고 생각했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항상 피곤했고 지쳐 있었다.
나는 MBTI 검사를 정밀하게 받아본 적이 없다. 검사가 정밀할수록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내게는 이미 너무 많은 '자기 관찰 빅데이터(무수한 자기 객관화의 생각과 기록들)'가 들어차 있었다. 외부에서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나는 '빼박 인프제INFJ'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나를 찾아 떠나는 지난한 여행이었다. 더 이상 무슨 검사지가 필요할까?*
'인프제INFJ'인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희귀성' 때문이다. 16개 성격 유형 중에 가장 희소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내 안에서 들끓던 혼란의 이유는 그 '흔하지 않음'에 있었다. 나는 타인에게서 비슷한 점을 찾기보다 '다른 점'을 먼저 찾았다. '다름'이 나를 선명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을 조심조심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다.
진화
내가 지나온 시간과 기록과 기억을 되돌려 보면, 긴 시간의 주기성을 발견하게 된다. 대략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20년의 간격을 두고 큰 변화를 겪어왔다. 주기가 짧은 자잘한 변화는 거의 없었고 선호하지 않는다. 하나의 주기 안에 있을 때 새로운 시도나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몇 번의 자잘한 시도들은 소용이 없었고, 더 깊은 수렁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화가 감지되는 순간들이 있다. 도저히 피해지지 않는 운명같은 변화의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눈이 있다. '옹호자' 특유의 통찰의 눈. 1단계는 타인에게서 해답을 찾으려던 긴 소모의 시절이었다. 2단계는 자아로 깊이 침잠했던 고통의 시절이었다. 3단계는 다시 타인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시절을 겪고 있다. '타인-자아-타인'으로 에너지가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시간을 관통하여 놓을 수 없었던 지난했던 '자아 관찰'의 시간이 나를 키웠다.
ㅡ '실패한 항해' (1단계: 초공감의 시절) - 가족, 타인, 학생
ㅡ '암흑의 동굴' (2단계: 자기해체의 시절) - 위암, 죽음, 우울
ㅡ '동굴 밖의 차라투스트라' (3단계: 신념완성체의 시절) - 정체, 작가, 가치
지금, 나는 '2단계'를 지나 '3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검사보다 분석을 신뢰하는 쪽이지만, 검사도 해봤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를 정리하면,
내향(I), 직관(N), 감정(F), 판단(J) ... 이상주의자, 완벽주의자, 지적인 사상가, 예측, 예언, 통찰, 독립, 창의, 차분, 신비주의, 열정, 몽상, 신중, 해결사, 공감, 관계, 고독, 철학, 심리, 계획, 도덕, 윤리, 호기심, 걱정, 고민, 높은 기준, 민감, 예술, 아니마, 자존, 자아, 음악, 독서, 글쓰기, 상징과 음모, 작가 재능, 언어 능력, 복잡, 지능, 이방인, 영성, 인간 본성, 비판에 두려움, 가치, 아름다움, 질, 눈치 빠름, 자아 성찰, 정직, 영감, 진리, 생각, 미니멀리스트, 따듯함, 매력, 경청, 사랑, 치유, 보호, 위로, 친밀성, 깊은 연결, 느린 관계 속도, 의미, 신뢰, 휴식, 재충전, 갈등회피, 의지력, 과거비판, 미래지향, 분석적, 과학적, 모순(감정적&이성적, 내성적&수용적, 구조적&개방적, 조용&평범 거부), 보이지 않는 세계, 고요함 속의 요동, 융통성 없음, 망설임, 포기, 기분 변화, 개인주의, 번아웃, 인정욕구
자기를 알 수 없어 한다.
자존의 문제로 평생 허덕인다.
적에게서도 선을 볼 수 있는 사람, 외로운 사람.
역설적이게도 모두에게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
큰 그림을 보면서 판단(결정)을 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어렵다.
차분한 외면과는 달리 내면에 강렬한 선악의 대비가 존재한다.
예수와 히틀러의 양면성, 자신의 편과 자신의 내면에서 선과 악을 모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