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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Feb 14. 2024

수능성적표 조작 사건의 전말(2)

삶의 분노(3)





"어머니, 숫자를 믿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믿으시죠."


이젠 내가 나설 차례라고 생각했다. 나는 말끝을 냉랭하게 떨어뜨렸다. 전화상담 때 언니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켰던 각종 진학데이터를 들이대면서 선아의 가능 대학을 나열했다. 너무 괴리가 컸지만, 그땐 그러려니 했다. 엄마의 마음이니까.


"아...예, 그건 알고 있죠."


무패의 권투선수 메이웨더가 삐딱하게 서서 한쪽 어깨를 잔뜩올려 상대의 주먹을 무력화시키듯 엄마의 말 위빙 솜씨는 탁월했다. 회사 회계 일을 하며 숫자를 신뢰하는 엄마에게 일침을 가하려 했지만, 내 문학적 언어는 허공을 갈랐다. 내가 무슨 소릴하고 있는 건가.


어머니는 이런저런 숫자 계산으로 머리가 복잡해 보였다. 선아의 거짓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6모 때부터일까, 9모때부터일까. 과목별로 외우고 있던 등급이 얼마나 부풀려졌는지 뺄셈을 하고 있는지. 진짜성적표의 등급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지 속으로 셈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말은 어머니의 마음 속으로 조금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선아의 성적 조작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여러차례 시도되었다고 엄마는 실토했다.  




"어머니, 스무살 된 딸 이제 그만 믿고 놔 두시죠."

나는 어느새 선아의 시절 속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삼켜넣었던 언어들을 선아를 핑계삼아 어머니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도 물러서고 싶지 않아 계속 밀어붙였다.

"점수도 외우지 마시고 대학도, 직업도 결정해주지 마세요."

"……"

감정이 많이 누그러지자 선아 엄마는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선아야,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 그런데 이 사실을 아빠와 언니한테는 비밀로 할까, 말할까?"


선아 가정에서도 아버지는 지워진 존재였다. 나는 교사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이 집의 은밀한 비밀 속으로 들어가려하고 있었다. 가벼운 두통이 밀려왔다. 1년을 산 듯한 하루가 갔다. 선아가 외로워 보였다.


사랑한다면서도 방법을 몰라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솔직하자면서 비밀은 가족 안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말하라면서 듣지는 않는 귀가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선아의 경쟁자는 멀리 있지 않았다. 선아는 좋은 대학에 진학한 언니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결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쉬운 선택을 했다. 가족만 잠깐 속이면 됐으니까. 자존심만 지켜내면 어떻게든 가족 안에서 버틸 수 있으니까. 선아의 본심이 내게는 선명하게 보이는데 가족들만 못 봤다.




선아는 그 시절 나를 소환했다. 가족 안에서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했던 가엾은 나를 보고야 말았다. 자존심은 사랑을 지키는 일이었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생존 투쟁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능력을 결과로 보여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낫지, 하는 비교우위 마음에 압도되어 있었다. 딱 그만큼만 세상이 보였다. 형제에서 또래의 사촌들, 친구와 급우들, 직장 동료들로 경쟁상대가 확장되었다.


우리는 왜 자신의 존재를 '능력(성적), 쓸모(경제적 지위)'로 증명할 수밖에 없는가? 그땐 내 고유함만으로도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걸 가르쳐 주는 어른이 없었다. 청춘의 시간을 모두 바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선아는 정시로 수학과에 입학했다. 국문과, 경영학과, 수학과, 출판에디터, 변리사...

선아는 단 한번도 자기 고유성을 고민해 본 적도 없었고, 끝까지 알아 채지 못했다. 너는 따뜻하고 섬세한 아이라는 추상 단어는 선아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나는 무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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