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분노(3)
선아*는 어제도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선아는 학교로 나오겠다고 톡문자를 보내왔다. 오늘은 엄마를 불러 함께 대화하자고 설득했다. 선아는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선아가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읽었다. 수능성적표 조작 사건을 끝내 말하지 못한 이유를 엄마를 만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어머니, 선아 대학진학 문제 때문에 상의 드릴 게 있는데 지금 학교로 나오실 수 있겠습니까?"
선아 엄마도 무슨 촉이 발동했는지, 일하는 도중이지만 학교에 10분만에 득달같이 달려왔다. 선아, 엄마, 나 이렇게 빈 교실 한가운데 둘러 앉았다. 일부러 책상 배치를 삼각형으로 만들어 놓았다(누구의 편이나 일방적 훈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본 대입수능성적표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첫운을 땠다.
팩트부터 서두에 던지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원본 성적표, 조작 성적표를 보여 주었다. 사건을 알게 된 경위와 지나간 상황과 증거물들의 퍼즐을 맞추어 나가며 사실을 전달했다(인터넷에서 수능성적표 예시 샘플 PDF 파일을 다운받아 PDF편집기로 편집해서 학생용 공용 프린트에서 프리트했다가 에러가 나서 미처 나오지 못한 프린트가 바람에 날려 돌아다니던 것을 하필 3학년실 수학선생님이 주워서 내게 가지고 온 우연이지만 다행인 사건 경위를).
어머니의 표정은 상기되었지만 비교적 덤덤하게 내 얘기를 들었다. 날벼락 같은 예상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는 듯.
"오늘 아침에도 아빠랑 이렇게 톡문자 주고받았는데,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니?"
잘 참아내던 엄마는 지난 세월을 배신당한 듯 오열을 터뜨렸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아버님과 한 톡문자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특유의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제 수시발표 결과에 대해 실망한 아내를 위로하는 따뜻한 글이었다.
그런데, "하다가 안 되면 변리사 시키면 된다"는 마지막 말이 날카롭게 내 눈을 찌른다. 1년 동안 여러 차례 진학 상담을 했지만, 선아는 변리사의 '변'자도 내게 꺼내본 적이 없었다. 선아는 국문과를 가고 싶어했고, 출판에디터가 되고 싶다고 했다. 너는 출판편집자가 되고 나는 작가가 되어 힘을 합쳐 베스트셀러를 만들자고 농담처럼 진심을 담아 약속했었다. 선아의 직업은 엄마 아빠의 마음 속에 이미 설계되어 있었다. 몇 번의 엄마의 오열과 몇 번의 추궁과 또 몇 번의 자책을 반복하는 동안 선아와 나는 침묵했다.
"말해 봐,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그 동안 말을 했어야 알 것 아니야."
엄마는 침묵하는 선아를 향해 마지막 변명을 요구했다.
나는 선아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이 기회야 네가 하지 못한 말을 솔직하게 해야 해. 엄마의 다그침에 선아는 없던 용기를 쥐어 짜냈다.
"엄마는... 중학교 때... 늘 성적... 외고...외고... 과외... 언니처럼(언니는 엄마의 진학데이터와 자신의 능력으로 서울의 유명여대에 이미 진학한 상태)..."
곁눈질로 엄마의 반응만을 살피던 선아는 분절된 단어들을 토하듯 쏟아냈다. 단어들은 문장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선아야, 더 시원하게 쏟아내야 돼. 장속에 굳어진 숙변을 싸지르 듯 시원하게 모두다, 하고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선아는 죄책감에 뱉어내지 못한 말들까지 주섬주섬 다시 주워담았다.
*학생의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