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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27. 2024

두려움을 살해하다

꿈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





꿈 이미지 - 뉴스, 이미 밝혀진 사건, 살인 회상, 나를 죽이려는 패거리, 혼자 남은 아이, 제압, 짓누르기, 아내에게 전화, 받아 줘 제발, 외면 또는 우연, 공범이 될 순 없어, 짓이기기, 분노, 증오, 살기, 살인을 결심, 사라진 하체, 뜨지 못하는 눈, 가늘게 쉬는 숨, 마지막 숨, 아이의 눈, 절명, 혀의 백태, 죽음 싸인

꿈 감정 - 두려움, 연민, 공포, 약자의식, 죄책감, 용기, 비겁, 회피, 공격성


살인범이 누구인지 이미 세상에 다 알려진 사건이었다. 어른이 아이를 죽인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아이들은 야생의 늑대들 마냥 우르르 몰려다녔다. 혼자서는 약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알았다. 그들 각자의 약점은 용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늑대들은 약해 보이는 사냥감 하나를 발견했다. 사냥감은 나였다. 녀석들은 동시에 덤벼들지 않았다. 하나가 달려들었다. 몸을 돌려 녀석의 눈을 응시하자 움찔 물러났다. 또 다른 녀석이 몸을 날리며 들어왔다. 양 손에 든 몽둥이 중 오른손에 든 나무곤봉으로 녀석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깨앵,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방어만으로는 저 많은 무리들을 감당해낼 체력이 없었다. 
나는 공격에 나섰다. 무리의 정중앙을 향해 달려 나가며 눈에 보이는 대로 왼손의 쇠파이프로 찌르고 곤봉을 휘둘렀다. 표적을 향해 활을 쏘는 궁사처럼 정확히 목표점을 찍었다. 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지자 한쪽의 무리들이 일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싸움의 승기를 잡았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눈빛이 살아있는 한 녀석을 발견했다. 나는 용기와 자신감이 차올라 무기를 버렸다. 맨몸으로도 감당해 낼 수 있을 만큼 녀석들은 애송이였다. 공격해오는 한 녀석의 목덜미를 오른쪽 팔로 걸어잠그며 넘어뜨렸다. 조르고 눌렀다. 누르고 압박했다. 녀석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강해서라기보다 녀석의 힘이 너무 형편없었다. 
누른 채로 아내에게 휴대전화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바로 신고하면 됐을 텐데 왜 아내를 부르려 했지 생각했다. 아내에게 내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현장에서 확인받고 싶어서였다. 아니면 내가 이렇게나 강하고 용기있는 남자라는 걸 인정받고 싶서였을까. 아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압박의 강도는 더 심해졌지만, 녀석이 저항하는 힘은 점점 약해졌다. 나는 왜 녀석을 그냥 놔주지 못할까. 이만하면 이긴 싸움인데... 당한 녀석이 더 큰 무리를 이끌고 복수하러 올까 걱정되었을까, 사건의 현장성이 사라지면 내가 피해자로 몰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때문이었을까. 나는 끝까지 강하게 녀석을 짓누르고, 압박했다. 힘을 가하면 할수록 분노와 혐오의 감정도 함께 커졌다. 부정적 감정은 살기로 바뀌었다. 이러길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옅은 숨은 붙어있었다. 죽여야 한다. 흔적도 없이. 살인을 결심한다. 공격하는 중간중간에 아이는 하체부터 사라져갔다. 이제는 상체의 일부와 가느다란 목덜미와 납작해진 머리만 땅바닥에 붙어서 나풀거린다. 무릎으로 목과 머리를 동시에 짓이긴다. 끊어지는 최후의 숨을 내 몸은 느꼈다. 최후의 숨은 깊었다. 그 마지막 깊은 숨마저 다 뱉어내지 못하게 나는 끊어버렸다. 뚝! 
마지막 순간에 아이는 눈을 잠깐 떴다. 나를 응시하는 짧은 찰나의 눈. 어, 저 눈, 저 눈, 이 눈, 이 눈, 어디서, 어디서, 많이 본, 많이 봐 온 눈. 아이의 눈 속에 슬픈 눈을 한 어른이 들어있다. 어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하고 아이의 눈 속으로 떨어졌다. 
검시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아이는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혀를 쭉 내밀고 죽었다. 검시관이 혀를 보며 죽음 싸인을 확인했다. 혀를 보면 죽음을 확인할 수 있나? 사람이 목 메달아 자살을 하면 혀가 쭉 뽑혀 나온다는데, 이 아이는 자살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분명히 죽였다. 물리력으로 아이를 죽였다. 살인을 저질렀다. 아무도 나를 잡아가지 않는다. 감옥 종신형보다 더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다. 아내가 사건현장에 끝까지 나타나지 않아 공범이 되지 않은 건 다행이다. 




공포와 공격성으로 가득 찬 당황스러운 꿈을 꾸고 나면, 흔히 그 꿈을 우리의 인생사에 기초하여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꿈은 훨씬 더 먼 과거에서 유래한 흥분을 반영하는 경우가 더 많다. 렘수면 중에 강렬한 꿈을 꾸는 인간은 자신을 자연이 낳은 동물로 여긴다. 삶을 평온하게 꾸려가면서 매일 책상 앞에 앉는 사람도 밤에는 때때로 사냥감을 뒤쫓아 달리고 두들겨 패는 꿈, 혹은 치명적인 심연으로 추락하는 꿈을 꾼다. 꿈은 늘 우리를 윈시적인 과거로 다시 데려간다.*


원초적 폭력성의 근원을 쫓는다. 살인하는 꿈. 이제 이런 꿈은 내게 악몽이 아니다. 내안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성에 놀라지 않는다. 표면적 폭력성 안에 약자의 두려운 눈이 떨고 있다. 나는 그 눈을 연민한다. 약자의 생존 방식은 선제 공격하거나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다. 공격의 방식이 위험한 이유는 잔인성 때문이다. 닥쳐올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보복의 씨앗까지 잘라야 하는 극단적 폭력이 자행된다. 회피의 방식은 일시적 해결책일 뿐이다. 공격 당할 위험이 근본적으로 사라진 건 아니니까. 계속 도망다니다 보면 회피가 습관이 된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피하고 싶어진다. 아닌 척하면 할수록 두려움은 더 크게 증식한다. 불안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한다.     


두려움의 감정이 상대에게 들키는 순간 자신이 공격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잠식당한다. 영화 <한산>에서 거북선의 공격에 살아온 부하 장수는 전설 속 바다괴물 복카이센을 보았다며 두려움에 떤다. 와키자가 야스하루는 "두려움은 전염병이다."라고 말하며 부하장수에게 처형을 간접적으로 명하고 막사를 나간다. 곧바로 처형이 집행된다. 남자에게 두려움은 생존을 위해 숨겨야 하는 약자의 수치스런 감정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생존투쟁의 장에서 두려움은 타인에게 쉽게 옮겨간다. 남자에게 두려움은 혼자서 지고나가야 할 극복의 대상이다. 여자는 두려움을 공유한다. 두려움을 공유하면 연대의 힘이 생겨난다는 걸 안다. 무섭다고 말하는 순간 두려움을 서로 연민의 감정으로 희석시켜버린다. 두려움과 연민은 동전의 양면이다. 


두려움의 요인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존재한다. 두려움은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이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불안한 심리 상태이다. 불안을 숨기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찾는다.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을 볼 때 그 감정은 일시적으로 사그러든다. 두려움이 많은 자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아 외부에서 결핍을 채우려고 애쓴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다. 굳이 실체를 말하자면 '어둠의 그림자'라는 환영이다. 


'미지未知'와 '무지無知'가 두려운 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과 맞서기 위해서는 상대와 실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환영을 실체로 드러나게 해야하고, 모르는 타인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상대의 마음 이면을 얼핏 보게 되면 상대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녀린 영혼일 뿐이란 걸 알게 된다. 마침내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당신의 감정을 읽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게 먼저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먼저 드러내는 걸 두려워 한다. 감정은 나의 정체성이 아니다. 감정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바람같은 것이다. 주변 공기 변화에 따라 드러나는대로 놔두면 된다. 드러난 내 감정에 따라 상대를 반응하게 내버려두면 된다. 그러면 두려움의 안개는 일순간에 걷힌다.            

                                                  



과거는 단지 재료를 제공할 뿐이다. 꿈을 설명하는 열쇠는 현재다. 그렇기에 꿈속 장면의 상징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꿈 시험의 배후에는 억압된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숨어 있지 않다... 오히려 현재의 불안이 자신과 어울리는 기억을 불러낸 것일 뿐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눈을 응시한다. 나는 내 눈을 응시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 아이의 망막에 반사된 내 눈을 선명하게 보았다. 죽이려는 살기와 살려는 원초적 욕망 사이에서 떨고 있는 눈. 나는 아이들의 순진성이 무섭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아이들 속에서 생활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삶은 내 유년시절과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지금 만나고 있는 아이들 속에 투영되어 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감정이 고갈됨을 느낀다. 그 피로를 감내할 체력이 내겐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흠칫 물러난다. 나는 너를 알고 싶지 않다. 너를 모르니 나는 네가 두렵다. 


무지의 상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시성은 그 자체로 선하면서 악이기도 하다. 그 무지의 껍질을 깨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교사는 늘상 실패하는 직업이다. 그 상대가 무지함과 순진성을 모두 지닌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밀도는 어른보다 아이가 더 높다. 아이들은 위험의 경험이 어른보다 부족하다. 자신이 어느 정도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위험을 가늠하지 못한다. 그래서 늘 방어부터 한다. 아이들의 방어 수단은 변명이다. 


변명은 상대에게 약점이 이미 다 드러난 패이다. 이미 실패한 패를 만지작거리며 억지를 부린다. 아이들을 상대할 때 이 점이 힘이 든다. 자신이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은 완전한 실패의 결과를 맛보게 하는 게 좋은 방법이다. 어른들은 이 실패까지 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실패를 맛보지 않게 해석과 설명으로 결과를 알려주려 한다. 이것은 어른들의 착각이고 예견된 실패다. 시간을 견디는 사람이 참어른이다. 


아이가 실패할 걸 알지만 천천히 뒤따라가며 참을 수 있는 어른.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아이를 좋은 어른으로 자라게 만든다. 부모와 선생은 이런 어른의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간다. 부모와 선생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을의 아이를 함께 키워야할 어른이란 점에서 한 배를 탄 사람이다.     



*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 슈테판 클라인, 웅진지식하우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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