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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ul 16. 2024

바람을 질투하다

꿈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





꿈 이미지 - 노숙, 유랑, 바람, 도시, 거리, 지하도, 물방울 소리, 습기와 먼지, 그녀의 방, 소유할 수 없는 사랑, 떠남, 정착의 꿈
꿈 감정 - 질투, 사랑, 소유, 정착, 떠돎, 외로움, 해방, 자유

"너는 어디서 자니?"
"방에서 자."
"너 집 없잖아."
"나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어."

그녀는 노숙자다. 그런데 방이 있다고? 그녀의 방이 궁금해진다. 그 방은 그녀만의 힘으로 마련한 온전한 공간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버려진 개를 키운다. 떠도는 암컷들은 위험하다. 떠도는 암컷들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누구의 소유가 아니므로 자유의 암내를 바람 속에 퍼뜨린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녀는 내 것이 아니다. 일 주일에 단 하루 노숙을 할 때 그녀는 나의 연인이 된다. 나머지 여섯 날 밤 그녀가 잠자는 곳이 어디일까 궁금하다. 그녀의 거처를 마련해준 이는 누구일까. 거처를 마련해 준 댓가로 그녀는 무엇을 지불했을까. 나는 그녀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나 또한 집이 없는 노숙자기 때문이다. 그녀를 내 품안에 담아 가둘 수가 없다. 그녀는 이미 형체가 없는 바람이다. 나는 나무가 되고 싶은 바람. 우리 둘은 모두 바람이라서 서로를 끌어 안을 수 없다. 끌어안으면 그대로 서로를 통과해 바스라져 버린다. 바람을 어떻게 방안에 가둘 수 있을까. 방안에 가두는 순간 바람은 바람이 아니다. 방은 바람의 울타리가 아니라 감옥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내 방에 가둘 수가 없다. 나는 그녀의 방이 궁금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때 나는 질투의 정의를 몰랐다. 대학 시절, M은 나를 친구로도 연인으로도 대하지 않았다. 나는 연인으로 공표할지 괜찮은 친구로 남을지 사이에서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친구라고 우기기엔 주변에서 이미 연인 사이라고 공공연히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정작 당사자들 사이에는 어떤 선긋기도 없이 애매한 상태로 두루뭉술하게 함께 붙어 다녔다.

어떤 특정 장소에서는 M과 걸을 땐 10미터 이상을 전진할 수 없었다. M에겐 친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M이 친한 척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친밀도를 가늠할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잠깐 길에 서서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M 옆에 서서 둘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M은 그 누구에게도 내 정체를 소개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나를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생각해보면 나를 소개할 정확한 호칭도 정체성도 애초부터 없었다. 그것도 관계 맺기에 서툴렀던 내 탓이 컸다.

꿰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옆에 서서 나는 모멸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 모멸감이 질투라고 생각해서 섭섭함을 표현하지 않았다. 나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둘이 있을 때도 M은 우리 둘의 이야기가 아닌, 내가 잘 모르는 그녀가 아는 그 누군가의 이야기만 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은 길었지만, 우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렇게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아닌 원래의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내 질투의 근원을 쫓는다. 오직 한 사람만의 온전한 사랑을 꿈꿨다. 누군가는 이기적이고 사랑에 대한 욕심이 많다고 했다. 대신 나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집착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많은 가면을 썼다. 내 사랑 방식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 사람의 시선이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잠시라도 가면 내 무의식은 강렬하게 반응했다. 야뇨증, 아버지에 대한 미움, 남성성과 폭력성에 대한 혐오, 삐지기와 침묵으로 저항하기, 무관심한 척 연기하기, 예술적 취향과 관심, 고매한 정신과 이상향에 대한 추구... 내 행동적 특성을 설명할 한 단어는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갈구, 그리고 '질투'였다.

질투는 상대의 비교우위와는 상관이 없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자기 감정이다. 열등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달려야 했고 채워지지 않아 가려야 했다. 침묵은 '안 그런 척하기'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입 닫고 있으면 사람들은 '뭔가 있는 것'으로 알어서들 착각으로 채워 주었다. 하지만 스스로는 잘 안다. 내게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존재하며 영원히 채울 수 없어 불안에 쫓기고 있다는 걸.    

질투는 누군가를 쫓게 만들면서 스스로 쫓기게도 했다. 초조하고 조급했다. 걱정이 행동을 앞서 내달렸다. 빠르게 흐르는 내면의 시간과 느리게 흐르는 외부의 시간이 불협했다. 시간의 불협에 현기증이 났다.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질투의 감정은 자기 경쟁을 부추겼다. 나를 이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와의 싸움을 즐겼다. 이름하여 독학자 모드. 관심이 생기면 찾아서 공부하고 훈련했다. 기대치가 높아 스스로 만족할 수준이 될 때까지 밀어붙였다. 배움의 속도는 느렸지만 내 것으로 단단하게 체화되는 만족감이 있었다.  

강한 것에 대한 강박은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는 꼴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강하고 싶었다. 몸 만들기에 열심이였고, 정신의 근육을 키우려고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위암에 걸려 신체의 대사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바뀌었고, 자아가 비대해져서 정신은 혼탁해졌다. '진정한 강함'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다. 말랑말랑한 것이 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꼿꼿하게 버티다가 결국 부러지고 마는 딱딱한 것의 연약함.




질투를 다르게 보기로 했다. 질투는 내 사랑의 척도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질투를 느꼈다면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서다.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내 질투는 당신을 이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또 다른 언어이다. 질투는 숨길 것이 아니라, 마음껏 표현해도 되는 사랑의 언어이다.

누군가에게 아무리 많은 사랑을 퍼붓는다 해도 나는 나를 질투하지 않는다. 주는 사랑 자체가 내 안의 충만이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을 잠시 미루어 두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시간은 스스로를 결핍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도 질투가 나지 않는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의 감정으로 채워지므로 괜찮다. 그럼에도 당신이 내가 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또 다른 타인에게 준다면, 그것은 당신이 사랑으로 충만되는 일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공유(에리히 프롬 식으로는 '존재')이니까. 제대로 사랑하려면 너와 나는 각자가 부유하는 자유로운 바람이어야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묘비명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영원한 자유인이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인간의 마음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닌다. 영혼의 자유를 얻은 자는 마음을 방 안에 가두지 않는다. 자신이 바람이니까, 타인을 구속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와 타인이 바람 같은 존재라는 걸 인정할 때 완성된다.

질투가 나이를 먹는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한 인간의 일생을 지배해온 사랑의 방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랑의 방식은 조금씩 바뀌어 간다. 받는 것을 줄이고 주는 것을 늘리는 방식으로. 자신과 연결된 가까운 사람들에서 사회와 인류 전체로 대상이 확대된다. 많은 이들에게 십시일반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자기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것으로 삶은 완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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