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5시 30분. 고요한 새벽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잠이 깬다. 전화벨의 알람 소리는 채 두번이 울리기도 전에 꺼버릴 정도로 몸은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옆에서 고이 자고있는 아내가 깰새라 조용히 출근복을 손에 쥔채 안방에서 거실로 나온다. 혹여나 아들이 깰까봐 거실에서도 숨을 죽인채 거실불을 환히 밝힌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다름아닌 탈모약 섭취다. 미지근한 생수와 함께 소중한 머리털을 위하여 탈모약을 집어 삼키며 더이상 빠지지 않길 바라는 짧은 기도와 함께 세수를 하러 들어간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아침 커피를 내려먹으며 여유롭게 출근준비를 한다. 회사 셔틀이 오는 6시 30분까지 나에게 주어지는 황금같은 휴식이다.
복지가 끝판왕인 이 회사는 본사까지 셔틀을 운영하고, 아침에는 한식, 샐러드, 해장라면 세가지의 조식을 제공한다. 아침 출근하자 마자 일을 바로 시작해야 하는 바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사무실에 앉아서 식사를 할수 있도록 다양한 픽업식사 메뉴도 제공하여, 출근길에 원하는 음식을 몇개 주워담아 사무실로 올라 가도 된다.
소위 이야기 하는 취업 스펙이라게 전혀 없는 상태로 준비를 하며 힘들게 보냈던 취준생 시절을 떠올리면, 어쩌다 이렇게 까지 오게 되었는지 참 감사할 따름이다.
현재 재직중인 회사의 입사 당시 중학교 학생기록부 제출을 요구 받았다. 보통은 대학성적정도만 제출하거나, 고등학교 성적정도 까지 요구 하기도 하지만, 중학교 성적까지 제출 해야 하는 회사는 드물다. 그렇게 중학교 성적을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 지금의 중학교 성적체계는 어떻게 바뀌었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수우미양가'로 평가를 받던 시절이었다. 시대가 편해져서 인터넷으로 쉽게 중학교 학생기록부를 인쇄할 수 있었고, 이내 '수' 로 가득차 있는 성적표를 보고 적잖히 놀랬다. 내가 이렇게까지 공부를 열심히 했던가. 그런데 어쩌다 대학생활은 엉망이 되어버린 걸까.
비록 태어나고 자란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 이었지만 우등생의 타이틀을 유지하며 소위 전교에서 노는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유일하게 가진 능력이라고는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게 특기였기에 시험을 치르고 100점을 맞을때마다 과목당 만원씩 용돈을 타는것, 그것이 삶의 목적이었고 즐거움이었다. 때마침 나의 얼굴을 화려하게 수놓은 여드름은 대인기피증을 불러 일으켰고,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얼굴로 먹고 살것도 아닌데, 공부만 하자'가 일종의 만트라였다.
부모님은 한의대를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한의사는 어느덧 나의 꿈이 되어 있었다. 때마침 허준이라는 드라마는 한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선망을 가질수 있는 좋은 영양분이 되어 주었고, 한의사만이 유일하게 내가 갈길이다고 착각하며 죽기 살기로 노력해 보자 다짐을 거듭하였다.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의 전교 순위권 친구들은 대부분 외국어 고등학교나 과학고를 가는게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하지만 날고 긴다는 친구들이 모이는 그곳에 가면 기가 죽을수도 있다는 부모님의 판단이었는지 내신성적을 위하여 학군지에 위치한 일반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다.그리고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아닌 반배치를 위한 배치고사라는 시험을 치뤘고, 성적순으로 반배정을 받게 되었다. 전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중학교 시절의 나는 고등학교 배치고사에서 전교도 아닌 반에서 10등으로 밀려난 처참한 결과를 맞이 해야 했다.
열등감 이라는 감정이 이런걸까. 노력을 하는만큼 성적이 오르는 보상체계에 익숙했던 정신탓에, 모두가 노력을 하는 상황에서 적당한 노력으로는 후퇴만 있는 환경에 놓여 지게 되니,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힘들었다. 공부를 하는 친구, 공부를 적당히 하는 친구,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가 고루 분포되어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만 있는 집단에 내 던져지니 열등감은 이내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열등의식은 잘못된 방향으로 불이 번지고 말았으니,문득 '공부를 왜 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의 꿈은 진짜 한의사가 맞는 것일까?','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일까?' 라는 쓸데없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슬슬 정신적 방황이라는 노선을 타기위한 줄다리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진작에던졌어야 할 질문을 수능을 위해 전력질주를 해야할 시점에 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모든게 허망했다. 알고 보니 한의사는 나의 자발적인 꿈이 아닌 부모님의 의한 꿈인것 같았고, 이 모든 과정들이 자의가 아닌 타인에 의해 잘 닦여진 포장도로인 듯 했다. 갑자기 반항심이 일었다. 결국에는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몹쓸 언행을 배설하기 시작하였다. 열등의식은 잘못된 방향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걷잡을수 없이 커져만 갔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은건 당연하였고, 무력감과 허망함, 상실감 등등 모든 좋지 않은 감정들의 회오리 속에 매일매일 살아갔다. 몸은 책상에 붙어 있으나 눈동자는 시체와 다름없었다. 이럴것 같으면 왜 학교에 앉아 있어야 되는건가 라는 생각에 이르렀을때, 답을 찾지 못하면 인생이 엄청나게 꼬여 버릴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학교선생님께 찾아가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겠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이러이러 하다고 선의의 거짖말을 보탰다. 그리고 매일 출석도장을 찍듯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도서관이었다.
곧장 달려간 곳은 자기개발서적 코너였다.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꿈이란게 무엇인지, 꿈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등등 수시로 피어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책을 탐독하였다. 절박했다. 읽다 보면 뭔가 깨달음이 있겠지 라는 막연함이 아니라, 답을 무조건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정신을 지배하였고, 그 절박함은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는 책의 조언 조차도 필터없이 받아들이는 부작용마저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의대를 꿈꿀정도로 좋았던 성적은 드라마틱하게 내려가 인서울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정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선생님과 부모님은 눈치를 어느정도 채셨는지, 정시 수능으로는 가망이 없다는 판단하에 수시입학을 권하였다. 상향지원인지 하향지원인지 관심도 없었고, 거의 그로기가 된 상태였기에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시는 데로 하였다. 그렇게 대학과 전공이 허망하게 결정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찾지 못했던 근본적인 질문의 해답은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이어졌다.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면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아집마저 생겼다. 전공책을 읽고 중간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임에도 어김없이 대학 도서관에서 자기개발서를 읽으며 뜬구름 잡는 소리에 뜬구름 처럼 정신은 떠다녔다. 차라리 술먹고 여자 만나고 놀았더라면 그 나름데로 깨우침이 있었을 것이다.
중퇴를 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극구한 반대속에 실현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로서 대학생활의 위기를 부모님도 직감 하셨을 터였다. 부모님의 답답함도 있었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얼마나 더 답답하였겠는가. 어딜가서 터놓고 말할수도 없고, 뭐가 문제인지 스스로도 정리가 되지 않았으니 조언을 위한 질문을 만들 문장조차도 완성하지 못했다.
어쩌다 이지경 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문득 바라본 대학 성적은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 수준이었고, 여전히 과거의 잘나가던 한때를 떠올리며 현실을 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