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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둥바둥 김대리 Dec 21. 2021

나의 미국 이름은 에덤

지방대생인데 현대자동차 다니고싶어


'지방대생인데 현대자동차 다니고싶어' 의 글들은 회가 이어지는 연재 형식이 따르진 않습니다. 내용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글감이 생각날때마다 쓰는 형식이라서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읽으셔도 됩니다. 타고난 글쟁이가 아닌 다소 투박하고 거친 공대생이 쓰는 글이라 그런것이고, 고민하며 글을 쓰지 못하고 미루는 습관보다 다듬어 지지 않고 구성이 다소 엉망이더라도 글을 일단 쓰는 습관을 들이기 위함이오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나의 미국 이름은

요~에럼




'요~에럼, 워썹' 흑인 뚱댕이 친구가 나를 부른다. 어느새 나는 미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키가 180cm 몸무게 150kg에 육박하는 흑인 뚱댕이 베프 친구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주먹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스펠링은 Adam이라는 이름이지만 이곳 미국에는 '에덤'이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에럼'이라고 불러줘야 역시 미국 스타일인 것이다. 영어를 끔찍이도 싫어하고, 평생을 처다 보고 싶지도 않은 그런 존재로 여겨온 내가 지금 미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다니.



쉐도우 리딩을 줄기차게 한 덕분에 영어로 잠꼬대를 하고, 영어 스터디까지 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나는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행이었다. 이제는 진짜 미국에서 영어를 쓰고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좀 더 현실적으로는 그런 경험이라도 있어야 겨우 남들과 비슷한 수준의 스펙을 가질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모두가 어학연수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없으면 남자가 운전면허증 조차도 없이 사회생활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호주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갔다 오게 되면 특별한 게 없는 스펙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나에게는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졸업을 미뤄가면서 까지 그렇게 해야 할 상황이 싫기도 했다. 그렇게 한들 남들에 비해 뛰어난 스펙 한 줄이 더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구글링을 해보았다. '해외 취업', '해외 인턴' 등등. 내가 검색할 수 있는 키워드는 모두 털어 넣어 조사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토익점수조차 없는 나에게, 최소한의 지원자격 요건에도 충족되지 못하는 나에게 '어서 오세요~반갑습니다!'라고 말해주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교 사내 공고도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한 교내 게시판의 미국 인턴 선발 공고. 하지만 이 역시도 자격요건에 토익점수가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조건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미국 왕복 비행기 티켓에 숙식제공, 월급 지급 등등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잘하면 정규직 전환에 미국 영주권까지 스폰을 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경쟁률이 어마 무시할 거라는 생각에 초반부터 기죽고 싶진 않았다. 그냥 무턱대고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토익점수는 제출하고 나서 따면 될 터였다.



이거 진짜 실화인가

토익책 없이 이루어낸 성과




지금 생각해도 막무가내 정신이었다. 미국 인턴 선발 공고의 자격요건 중 토익점수가 떡! 하니 쓰여있는데, 점수도 없이 일단 접수를 해버리다니.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했는지 아직까지 미스터리이다. 어차피 잃은 것도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을까. 서류를 접수하고 나서 가장 빠른 토익시험날짜를 확인하고 응시하였다. 토익시험 유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일단 영어로 대화가 되지 않는가? 한국어를 할 줄 알면 언어 시험에 응시해도 어느 정도 점수는 맞을 것 같은 기적의 논리였다.



드디어 시험 당일이 되었다. 응시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아주 가벼웠다.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까. 떨림이나 긴장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듣기 시험은 마치 슬로모션처럼 내 귓가에 박혔고, 편하게 답안을 체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문법과 독해시험. 그냥 속으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객관지에 나와있는 답안들을 하나둘씩 넣어보고 어색한지 자연스러운지만 판단을 하였다. 시험을 그런 식으로 진행했으니, 시간이 남아돌 수밖에. 남들보다 일찍 시험을 마치게 되었다.



시험 성적 발표는 몇 주가 소요되었다. 혹시 점수가 낮게 나올 가능성에 첫 시험을 응시한 다음 주에 두 번째 시험도 응시해 놓은 상황이었다. 둘 중에 운이 좋아 높은 점수가 나오면 그 성적을 제출할 요량이었다. 그렇게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시험까지 응시하였다. 그리고 시험성적 발표날이 찾아왔다.



첫 시험은 895점, 두 번째 시험은 915점



성공이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뒤쳐지고 있다는 자괴감, 나만 독자 노선을 타고 있다는 두려움. 그간의 힘들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군분투했던 게 확신과 위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높은 성적을 가지고 미국 인턴 면접 당일 성적 제출을 할 수가 있었다.



1차 면접은 학교 교내 면접실에서 선발을 대행해주는 관계자들과의 면접이었다. 미국에 위치한 회사의 직접적인 관계자가 아니었기에 1차 면접은 서류 제출된 내용 위주의 사실 확인을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리고 이어진 2차 면접은 미국의 현지 사내 관계자와의 면접으로 화상으로 진행이 되었다. 외국인과 한국 주재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화면상에 나왔고, 나를 포함해 지원자들은 차례로 다대다 면접을 진행하였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영어질문들이 이어졌고, 지원자들은 본인의 스펙들을 어필하였다. 대부분 상경계열 사람들로 토익점수는 대부분 만점에 평점도 역시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관리를 잘한 것으로 파악이 됐다. 큰일이다. 내가 가장 뒤처진다는 직감에 마지막 차례였던 나는 긴장이 점점 되길 시작했다.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면접이 진행될수록 긴장감이 오히려 누그러지고 있었다. 다들 뛰어난 영어성적과 스펙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영어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인과 면접을 진행하는데 그들이 알아 들 수 없을만한 발음으로 토종김치를 외치고 있었다. 뭔가 승산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차례였던 나에게 질문이 떨어졌다. 그리고 대답하였다. 면접관과 지원자들은 동시에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어진 화면 속 미국 면접관의 말. "해외에서 살고 왔나요?" 게임 끝이었다. 내가 이겼다는 내면의 소리는 민원이 들어올 만큼 크게 외쳐대고 있었다. 그 뒤에 이어진 3차 임원 면접도 무사히 마치고 나는 미국행 티켓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렇게 암울했던 나의 인생은 터널을 지나 제2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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