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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둥바둥 김대리 Dec 22. 2021

아침도 햄버거 저녁도 햄버거

지방대생인데 현대자동차 다니고싶어


'지방대생인데 현대자동차 다니고싶어' 의 글들은 회가 이어지는 연재 형식이 따르진 않습니다. 내용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글감이 생각날때마다 쓰는 형식이라서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읽으셔도 됩니다. 타고난 글쟁이가 아닌 다소 투박하고 거친 공대생이 쓰는 글이라 그런것이고, 고민하며 글을 쓰지 못하고 미루는 습관보다 다듬어 지지 않고 구성이 다소 엉망이더라도 글을 일단 쓰는 습관을 들이기 위함이오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밥이 없다. 큰일이다. 집 밖을 나가도 밥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식점이나 김밥집을 미국까지 와서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밥집 하나는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온통 햄버거집과 팬케이크 집만 있었다. 낯설었다. 아침에 저런 음식을 먹고살 수가 있는 것인가. 미국에서의 6개월 동안의 생활에 나는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미국 인턴생활의 시작

아침도 햄버거 저녁도 햄버거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돈도 모으고 싶었다. 애당초 취직하기로 결심한 계기 역시 학원강사로는 수입 측면, 고용안정성 측면에서나 불안정한 게 큰 몫을 하였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취직을 하면 한 달에 4~500만원 정도 매달 받을 수 있으니 힘들게 아르바이트하고 과외하는 것보다 훨씬 고효율 일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대기업에 취직을 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어공부를 해야 했고, 경쟁자를 무찌를 수 있는 독특한 스펙이 필요했기에 미국 인턴에도 지원한 터였다.



일단 미국에 온 것까지는 순차적으로 잘 진행되었다. 게다가 숙식과 자동차, 월급까지 제공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미국의 인턴은 사실 월급이 없는 게 정상이다. 오히려 회사에서 가르침을 주니 인턴이 돈을 내야 하는 상황까지 있다고 들었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어떻게 합격을 했는지 아직까지 어리둥절한 사황이었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하늘이 준 기회에 배반을 하는 듯한 무거운 책임의식 같은 게 있었다.



미국 월급은 적지 않았다. 달러로 입금이 되었기에 돈 모으는 맛도 있었다. 전국에서 선발된 인턴 동기들과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은 설렘의 연속이었다. 천조국이라는 나라에서의 먹는 맥도널드 햄버거는 뭔가 특별했고, 이 나라에서의 쇼핑은 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느낌을 선사해 주었다. 어딜 가나 한국보다 두배는 컸다. 음식도 컸고, 쇼핑몰도 컸고, 사람도 컸다. 음식의 짠맛도 두배로 컸고, 칼로리도 두배로 컸다.




설렘과 신남은 이제 그만

나의 목표를 잊지 말자



"이왕 왔는데 좀 즐기자. 애럼~!". 인턴 동기중 한 명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난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살면서 이렇게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호화스럽게 미국에서 6개월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찾아올까? 집안에서 뒷받침해주는 것도 없는데 회사에서 밥 주고, 재워주고, 기름값 주고, 돈 주고, 귀국행 티켓 주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내가 얻고 배워가야 할 것들을 내 경험치로 쌓아가야 했다.



다른 모든 인턴들은 일과가 끝나고 그리고 주말에도 놀러 가고 쇼핑가기 바빴다. 미국에서의 일과 후 맥주는 정말이지 꿀맛 같았으리라. 같은 맥주라도 미국 맥주이지 않는가? 나도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영어공부. 회사에서 사귄 외국인 친구와의 약속이 동기들과의 술자리보다 앞섰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외국인 친구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냥 한마디라도 더 이야기 나눠보고 영어 실력을 더 쌓고 싶었다. 외국친구 집에 초대받아 레즈비언 룸메이트도 접하고, 결혼을 3번이나 했는데 처자식 양육비를 위해 쿨하게 월급을 헌납하는 친구도 만나며 문화 충격과 함께 세상 눈을 점점 키우기도 했다.



회사일도 열심이었다. 공대를 선택하였지만 전공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전공지식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취직도 어느 쪽으로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적성이 어떻고,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뭘까를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고민과 성찰은 나에게 사치였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거 같지도 않았다. 그저 없던 흥미와 적성을 만들어 내야 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주어진 업무가 아무리 하찮터라도 성심성의껏 일을 하였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였다. 선배들의 출장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쫓아다니며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그렇게 경험과 지식이 쌓이다 보면 없던 흥미가 생길것 같았고, 적성이 만들어 질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미국에 와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주말이면 미국의 유명 관광지에 놀러 가고, 미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식당에서 와인과 맥주를 곁들이며 즐기고. 기념샷을 찍고. 그런데 생각과 나의 행동을 일치하지 않았다. 나의 몸은 한국으로 귀국 후 나의 삶을 위한 준비를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미국에서의 경험은 남들과 차별화된 스펙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마냥 즐기며 월급을 탕진할 수가 없었다. 나를 계속해서 다그치고 들뜨는 마음을 가라 앉혀야만 했다.




돈 욕심의 시작

나에게 1,000만 원의 의미는



인턴과정이 거의 끝마쳐 갈 때 즈음 정규직 오퍼와 회사 스폰을 통한 영주권 기회가 왔다. '내가 미국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라는 설렘과 기대가 마음속에 가득 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혼자 무슨 부귀영화를 얻겠다고 여기 남아야 하는가?'라는 허망함과 외로움도 함께 찾아왔다.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 가족들이 계속 눈이 밟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서의 6개월간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던 나 자신을 한국에서도 테스트 해보고 싶었다. 충분히 취업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쌓였다. 그래서 정규직 오퍼를 거절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난 뒤 미국 계좌의 모은 돈을 확인해 보았다. 한국돈으로 1,000만 원 이상이 쌓여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하고 일하는데만 치중해서 남들처럼 쇼핑도 하지 않고, 놀러도 많이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뿌듯했다. 묘한 성취감 같은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학생으로서 1,000만 원은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부자가 된듯한 느낌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지금것 학원강사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통장에 몇십만원 몇백만원 있었을 때는 그저 돈을 모으고 있다는 느낌만 가지고 살아왔지만 그 액수가 1,000만 원을 넘어가는 순간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연봉 6천 이상을 받는 대기업에 취직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 설정이 세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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