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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둥바둥 김대리 Apr 30. 2023

지방대생인데 현대자동차 다닙니다

열등한 스펙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


'지방대생인데 현대자동차 다니고싶어' 의 글들은 회가 이어지는 연재 형식이 따르진 않습니다. 내용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글감이 생각날때마다 쓰는 형식이라서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읽으셔도 됩니다. 타고난 글쟁이가 아닌 다소 투박하고 거친 공대생이 쓰는 글이라 그런것이고, 고민하며 글을 쓰지 못하고 미루는 습관보다 다듬어 지지 않고 구성이 다소 엉망이더라도 글을 일단 쓰는 습관을 들이기 위함이오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2012년 졸업식. 대학 동문 후배들에게 취업턱이라 하고 ATM 에 가서 100만원을 찾아 뿌렸다. 다소 오만하고 잘난척 같아 보였지만, 좋은 기분을 주최할수는 없었다. 정말 보잘것 없는 배경과 스펙으로 내가 취업을 하다니. 4학년이 되어서 뒤늦게 준비한 취업준비. 토익좀수 조차 없었고, 평점은 최소 자격요건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비루하고 비참했던 내가 10년이 지난 지금, 행복하게 H 자동차에 다니고 있고 서울 자가에 갓 태어난 아이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보내고 있다. 믿겨 지지 않지만, 이 세상은 꼭 잘나고 배경이 좋은 사람들만 이렇게 살수있는건 아닌가보다.





유년시절 방황의 연속

집을 몇번을 나가봤니? 난 4번



초등학교의 기억은 거의 없다. 가출한 기억말고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지금와서 생각하니 부모의 마음 대못을 여러번 박았던것 같다. 얼마나 마음이 철렁 했을까. 뭐가 그렇게 답답하고 불만 이었는지 여러번 가출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집 근처로의 가출이었고. 더 진화하여 부산, 서울 등 지역을 넘나들며 가출을 감행했다. 철저히 계획하여 가출했으니, 초등학교때부터 머리가 비상했는것 같다.



그렇게 부모의 속을 썩여서 그런걸까.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공부란걸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여드름도 났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이런게 대인기피증이라고 부르는걸까. 버스를 타고 벨을 누르지 못했다. 두려웠다. 누르는 순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을 몇번을 지나쳤다. 학교에서 발표라도 하려치면 얼굴이 시뻘게 졌다. 안그래도 여드름으로 얼굴이 빨간데, 더 빨게 졌다. 문제는 내가 빨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할수록 더 빨게진다는 것이었다. 상태는 더 심각해 졌다.



도피할 수 있는곳은 없었다. 그저 집중할 만한게 필요했다. 어린 마음에 인생이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연예인 될것도 아닌데, 얼굴로 먹고 살것도 아닌데. 그냥 포기하자.’



이렇게 자위 할수록 마음은 잠시 편해졌지만, 여전히 도피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 도피처가 공부다. 차라리 공부라도 열심히 하자. 뭐라도 되겟지. 내 인생이 뭐라도 되겠지 하며 시작했다. 정말 엉뚱한 공부 계기였다. 그렇게 전교 꼴지를 도맡아 하던 초등학교를 정리하고, 중학교때 공부란걸 해보기로 했다. 집나갔던 나의 과오는 이걸로 덮어야 했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삶에 대한 도피처로 선택한게 공부였기에 절박했다. 그것밖에 없으니 사람이 초인적으로 바뀜을 그때 처음 느꼈다.



교과서가 새카맣게 변했다. 줄을 얼마나 그어댔는지, 지면에 원래 프린트 되어있던 글자가 보이질 않았다. 이해보다도 줄을긋고 외웠기 때문이다. 그냥 통채로 외워 버렸다. 어떤 시험 문제가 나오더라도 머리속에 암기하면 문제의 답을 어느정도 맞출수 있다는 계산법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과서를 항상 학년이 시작되면 어떻게든 두권씩 구했던것 같다. 밑줄을 수없이 그어가며 외워야 하는 무식한 공부법 이었기 때문에.



나름 효과는 있었나 보다. 어느새 중학교3학년 2학기 졸업즈음 전교 석차가 4등까지 가는 기염을 토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바로 기말고사 준비를 들어갔고, 준비라고 해봐야 그냥 달달 외우는 것밖에 능력이 없었던 나는, 남들 공부하는 시간보다 2~3배 정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영어 단어도 당시 유명했던 ‘뜯어 먹는 XXX 단어’ 책같은 암기할수 있는 교재를 통채로 외웠다. 영어단어를 많이 알고 있으니, 시험점수는 어느정도 확보가 될것이라는 생각이었고, 효과는 있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나의 모습에 부모님은 포기에서 희망으로 바뀐듯 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학군이 좋은 지역의 고등학교로 보내고 싶어하셨다. 그리고 이때 나의 꿈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내가 원하는 꿈과 목표가 아닌, 부모의 반복된 학습에 의한 꿈. 당시 공부좀 한다고 하면, 안정적인 ‘사‘자 직업을 가지길 원했고, 허준을 좋아했던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한의사가 꿈이 되어버렸다. 내가 원했다기 보다는 부모에 의한 강요에 가까웠다. 그렇게 나는 나의 꿈이 아닌 남의 꿈을 품은채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당시 고등학교는 심화반 제도라는게 있었다. 고등학교2학년에 심화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여기서 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온것이다.



사춘기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적 방황과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스스로 인지하고 고민하면 그게 사춘기라고 나는 정의한다. 이때부터 공부를 손에 놓기 시작했다. 왜냐면 갑자기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게 무엇인지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야간자율학습을 빼면서 도서관을 가기 시작했다. 꿈을 찾기 위한 자기계발서를 탐독하기 시작했고, 단순히 암기만으로 성적을 올렸던 내가 심화반에서 더이상 효과를 들어내지 못하자 각종 공부법을 찾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남들에게 효과가 있는 방법과 꿈들이 나에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나 자신을 버리고, 남들이 효과를 보았다는 각종 방법과 삶의 가치관을 나에게 적용하다보니 더 혼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인생이 바닥으로 치달아 가는 무렵, 주변에서 눈치를 챘는지 그냥 수시전형으로 대학을 진학하라는 권유가 있었다. 자포자기라는 심정이 이런걸까. 그냥 모든 의욕을 잃어 버린상태였다.



딱히 뭐가 되고 싶은것도 없었고, 더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것도 없었다.



대학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어느 대학을 가고 싶다, 어느 전공을 선택해야 겠다는 것도 없었다. 나만 그런걸까. 나같이 이런 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는 사실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만 그런줄 알고, 더 위축이 되어 주변의 권유로 지방 국립대 공대를 수시전형으로 가게 되었다. 대학생활을 하면 조금 나아질려나. 하지만 방황의 연장선에 있었을뿐 취업시기에 나에게 잔인한 결과와 자업자득의 뉘우침만 존재할 뿐이었다.




대기업을 다니는 지금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잇습니다.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다. 고등학교때 찾아온 사춘기로 방황을 하고. 원치않은 그렇다고 원하는 대학교도 없었던 당시에 수시로 지방대 아무런 곳이나 들어가고. 과선택도 친척이 취직이 잘된다니 공대를 선택하고. 막상 대학생활 동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외활동은 전무하고. 취업을 앞둔시점에는 토익점수도 없었고, 평점도 수준 미달이었고.



그랬던 내가 그렇게도 영어를 너무나도 증오하고 싫어했는데, 미국에서 인턴으로 선발되어 6개월을 보냈다. 평점은 서류 지원 최소요건도 한때 만족하지 못했는데, 5군대나 최종 공채합격이 되었다.



지방에서 상경할 당시 무일푼으로 올라왔는데, 지금은 서울 자가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대인기피증이 있었는데, 이제는 소수이긴 하지만 친구들과 많은 동료들이 생겼다. 너무 감사하다.



세상물정 하나도 몰랐던 내가 경제를 공부하고 부동산을 사고팔며, 온라인에서 물건을 팔기도 했고. 때론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이익을 볼 때면 '하면 되는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이과생이라고 책을 멀리하고 재능이 없다고만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책을 읽고, 출판사에서 서평 제안이 들어오고, 글을 쓰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행복하고 즐겁기 까지 하다.



첫발을 디딘 회사가 마지막 회사일줄로만 알았고, 운 좋게 들어간 줄 알았는데. 보잘것없게만 느껴졌던 스펙과 출신으로 이직을 거듭하며 지금은 H 자동차에 입성하였다. 보상이며, 출퇴근이며, 역시 대기업은 대기업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앞으로 연재할 글들은 특별할 것 없는 나의 삶의 경험들이  어떻게 취업에 도움이 되었고, 어떻게 그 경험들이 특별함으로 바뀌도록 노력했는지에 대해 써볼 생각이다.



토익공부를 하지 않고 토익점수 900점 이상 받은 경험과 오픽(OPIC) 등급을 AL로 유지한 방법. 미국 인턴에 합격하고 생활한 이야기. 대학시절 과외하고 학원강사했던게 취업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고, 회사생활에도 좋은 영향을 준 이야기. 퇴사를 하고 사업을 한 이야기. 중간 중간 에필로그로 부동산투자 이야기와 주식투자를 통해 회사 생활에 끼친 좋은 영향에 대해서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길 기대해보며 실력없는 글로 꾸준히 써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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