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간직한 애착있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오랫동안 간직한 애착있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는
신세계 빌리브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문득 스무살의 추억이 떠올라
책장과 서랍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삶이 고단할 때마다 찾아보는 시집 한 권이 있다. 자주 찾은 탓에 나의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오래된 나의 물건 중 하나이다. 초판 1쇄 발행 2001년 12월 7일. 제목은 ‘마음이 예뻐지는 시’, 가격은 5,000원. 진주시내의 한 서점에서 남자친구와 한 권씩 똑같이 구입한 시집이다. 스무 살 때의 기억이란게 마치 전생처럼 아득할 때도 많아서 그때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은커녕 기억해내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시집만은 이상하게도 펼칠 때마다 새록새록 기억나는 것들이 많아, 자꾸만 나를 스무살 그때로 데려간다.
01학번의 스무 살이었던 내가 오롯이 담긴 그 시집을 펼치면 그때의 기억들이 흘러 넘친다. 스무 살의 여름밤, 장미꽃 100송이를 차 트렁크에 싣고 나를 만나러 왔던 남자친구의 미소와 고백이 그 곳에 담겨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기억나는 장면들은 신기하리 만치 선명하다. 2002년에 상영했던 영화 ‘연애소설’을 함께 봤던 기억, 영화관을 나와 함께 걷던 길의 공기까지, 기억하려 애써 노력해도 기억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마치 영화처럼 주르륵 떠오른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처럼 내 스무 살의 공기와 향기를 기억하게 해주는 매개체인 셈이다.
멜로영화를 보며 다시 그때처럼 설렐 수 있을지 자문해보며 쓸쓸해지고야 마는 마음을 달랠 적에,
기대되는 것들보다 그러려니 하는 것들이 많아진 나의 변화를 문득 느낄 적에,
어른의 책임을 다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가끔 힘이 빠질 적에,
스무 살의 기억마저 이제는 희미하다며, 어른생활에 매몰되어버린
시들한 내 자신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때마다 시집을 찾곤 했다.
2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흔적과, 시집의 여기저기 스무 살의 나이만큼 어린 글씨체로 남겨놓은 유치한 낙서마저 사랑스러운 나를 들춰보는 일은 이렇게 큰 위로가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메모하는 습관은 여전했다는 것에 미소가 지어진다. 지금과는 다른 그 때 나의 상황과 마음가짐이 느껴지는 그때의 나의 메모.
나도 한때는 사랑스러웠던 소녀였다고, 마음껏 설레이던 스무 살이었다고, 우리는 결국 비슷한 변화를 거치며 어른이 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스무 살을 때때로 펼쳐보는 일은 이렇게, 이제는 마음껏 사랑스러워질 수 없고, 절대로 무모해질 수 없는 나의 뜨거움과 사랑스러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나의 ‘스물’과 함께 기억나는 노래도 하나 있다.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년’. 내 기억의 오류일까 싶어 검 색해보니 정확히 2001년 6월에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노래를 들으면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손을 잡고 길을 걸었던 풍경, 헤어지기 싫어 자취방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던 기억들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는 스무 살의 내 생일에 브라운아이즈의 첫 앨범을 선물했다. 그를 우연히 만났던 날의 계절과 사귀자고 말했던 날의 공기는 잊혀졌다가도 이렇게, 노래 한 곡으로 다시 선명한 추억이 된다. 레트로가 유행이 되며 가끔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이 노래가 들려올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집으로 돌아와 선물 받았던 그 씨디를 꼭 찾아 보곤 한다. 자주 찾아보진 않지만 나만이 찾을 수 있는 그 자리에 여전히 존재함을 확인하면 안심이 된다.
기억이 깃든 물건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자주 잊고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누군가에겐 그저 노래 한 곡으로 기억되는 한 가수의 첫 타이틀곡이 나에겐 처음 연애하는 소녀의 사랑스러움을 상기시켜주는 매개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세상을 각자의 시각으로 다르게 살아가듯, 같은 물건이라도 상황과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된다. 누구에게나 설레고 뜨거운 시절이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시간은 자연스레 흘러갈 테지만그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는 영원히 존재한다. 추억엔 힘이 없다는 생각에 애써 어떤 물건을 보관하려 노력하지 않는 나에게 조차도 어떤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는 있기 마련이니까.
설렘은 이십대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할 만큼 혹독한 현실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요즘이다. 눈앞에 주어진 다양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골머리가 아픈 나지만 지금 이 모습이 나의 전부는 분명히 아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싫어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귀여운 거짓말을 하는 사랑스러운 소녀도, 처음 잡은 손이 찌릿해 손을 잡은 채로 멀리 팔을 벌려보던 설레는 스무 살의 그녀도 나다.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듯, 모든 이에게 뜨거운 순간이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 이성적이고 차가워지는 중일지라도 뜨거웠던, 설레었던 순간을 기억하자. 눈앞에 놓인 커다란 돌덩이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때 의 편지 한 장, 노래 한 곡 꺼내보는 거다. 추억엔 힘이 없다는 힘 빠지는 말보다는 추억으로라도사랑스러운 나를 반추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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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신세계건설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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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아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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