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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Jul 20. 2024

은쑥의 기억

그림 이은숙

이번엔 식물이다. 철학자의 낱말 상자는 다채로운 빛깔의 꽃들로 채워지고, 삭막했던 베란다는 모네의 정원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발한다. 장 보러 가는 날이나 병원을 다녀오는 날엔 어김없이 남편과 실랑이를 벌인다.

“전에 샀던 화분이야!”

“맞아. 같은 패랭이지. (하지만) 다른 패랭이야. 이건 수염패랭이. “

토분에 옮겨 심을 꽃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 보이는 것으로 그녀는 이미 승리를 거머쥐었다. 베란다에 있는 분홍색 꽃들과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도 같아 허리를 숙인 남편은 다섯 장의 꽃잎 중앙에 분홍빛깔 원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꽃값을 치렀다.


철학자의 서고에서 온갖 식물의 이름이 불린 것은 한때 뛰어났던 친구들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자기 이름을 잊고 지내온 누구누구의 엄마. 숱한 그 엄마들이 좋아했던 식물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 문득 서글펐다. 꽃들도 제이름으로 불리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름을 잊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엄마가 되었다. 어쩌면 철학자가 악착스러울 만큼 전문인이 되려 한 것도 아빠가 남겨준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던 날, 지도교수가 물었다.

“어렵게 공부해서 솥뚜껑 전문가가 되려는 건 아니지? “

우습게도 글을 모르는 철학자로 돌아온 지금에야 솥뚜껑에서 온전히 해방되었다. 조금 늦었으나 스승과의 약속은 지킨 셈이다.


분홍빛 사계패랭이 곁에 오늘 들여온 수염패랭이를 세워 본다. 삼색 에키네시아, 마가렛 데이지, 수국, 작약, 옐로체인, 아주가, 빈카. 설압자에 서툰 필체로 그려 넣은 꽃들의 이름을 정성스럽게 불러가던 철학자의 입술이 멈춘다. 아지랑이쑥이라고도 하는 은쑥. 가늘고 부드러운 잎에 은분을 뿌린 듯 곱고 우아한 자태가 나비를 부른다더니 참말이었다. 잠시 대학시절로 돌아간 철학자는 노란 나비핀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친구의 옆모습을 보았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 밝은 미소를 지녔던 친구의 꿈은 화가였고 그녀는 꿈을 접어둔 채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여전히 곱지만 그 시절 꿈 많았던 눈빛과 희망찬 미소는 빛을 잃었다. 잊고 지낸 친구의 이름이 철학자의 눈앞에 서 있다. 손을 내밀어 은쑥을 조심스레 스쳐본다. 쑥 향기가 코끝에 은은히 번지고 교정 벤치에 앉아 친구와 나누었던 꿈 이야기가 어슴푸레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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