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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Sep 05. 2024

릴리의 심연

그림 이은숙

짙은 여름, 화단에는 검붉은 릴리가 탐욕스러운 입을 벌려 뜨거운 햇살을 삼킨다. 순백의 향기가 기억의 전부였던 그 이름에 균열이 생겼다. 모든 단어가 철학자에게는 해체된 기억이지만 시뻘겋게 충혈된 눈의 모습을 지닌 '릴리'는 가히 충격이었다. 가장 먼저 코끝에 갖다 대던 단어는 이제 다가서기조차 두렵다. 온통 붉은 여름 한낮의 현기증에 철학자는 급히 집으로 돌아선다. 


저녁 내내 서고에 틀어박혀 '릴리'를 곱씹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릴 적 한 마당을 공유했던 이웃 아저씨의 자상한 향기다. 서울로 이주한 첫겨울, 그 마당엔 동백이 한창이었다. 언니와 오빠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들어선 그곳에서 철학자는 아빠의 부재를 강하게 인식했다. 붉은 동백은 아빠의 눈물 같아 어딘가 모르게 쓸쓸했다. 집집마다 동백의 겨울엔 문을 걸어 잠그고 가족의 사랑, 연인의 사랑을 키워갔기에 더욱 얄미운 단어였다. 다음 해 여름, 초등 철학자에게 릴리가 찾아왔다. 새하얀 릴리는 하얗게 머리가 새버린 아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자기 손녀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조그만 철학자에게 지어 보이며 '너는 꼭 이 릴리 같구나'라며 정성껏 가꾸어온 화단의 보물을 건넸다. 이토록 따스하고 다정한 단어의 첫 경험을 검붉은 릴리가 동백의 쓸쓸함과 함께 뒤섞어 혼란스럽다. 


마음의 동요를 진정하기엔 로즈메리 잎이 제격이다. 끓인 물을 찻잔에 붓자마자 청량한 허브향이 혼잡해진 단어의 기억에 스며든다. 곧이어 '릴리'는 철학자의 시선을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으로 옮긴다. 이 근사한 사전의 주인, 에즈미에게 '릴리'는 잃어버린 최초의 단어였다. 엄마의 이름이 사전에 수록된다는 사실에 흥분한 그날 불꽃 속으로 던져진 인용문을 구하려 고사리 손을 뻗은 에즈미의 손가락에 다행히도 '릴리'는 영원히 각인되었다. 19세기 옥스퍼드 뒤뜰 비밀스러운 스크립토리움에서 자란 사전 편집자의 이야기처럼 철학자에게 '릴리'는 부재와 영존의 느낌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마법이었다. 단어를 잃어버리고 동백의 우울함에 물든 릴리를 만나고서야 보이기 시작한 단어의 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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