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은숙
손녀가 그리다 만 파란색 몽당연필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꼭 나 같아.
처음 연필심을 깎고 신나게 그려지고 나면 어느새 키가 줄고 몸체는 낡아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는 볼품없는 존재. 한때는 기억을 잡아두는 중요한 도구였지만 이젠 그마저도 손바닥만 한 기계에 빼앗겨 굳이 쓸모를 주장할 수도 없는 상태.
-정말 나 같네.
어느 여름, 제주 북동쪽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생소한 마을에 들어섰을 때 한 간판이 철학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피터 펜슬> 영어 이름이 ‘피터’이거나 아니면 피터팬을 꿈꾸는 동화 같은 주인장을 상상하며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어렵게 열었다. 두 번째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오래된 가옥의 얇은 문을 열고 지나는 것조차 애써 공을 들여야 했기에 더욱 신비스러운 입장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창 안에 창이 철학자를 맞는다. 이 맞은편 창엔 유리가 없다. 순간 문 밖에서는 맡을 수 없던 흑연 가루 향에 철학자의 후각은 완전히 지배당했다. 최면에 걸린 듯 검은 향을 따라 철학자의 기억은 아빠의 옛 교실을 헤맨다.
이젤 앞에 앉은 아빠의 학생들 손엔 똑같이 검은 색연필이 들려 있었다. A자형 나무 기둥 사이를 비집고 보니 벌거벗은 사람이 의자에 앉아 불편한 자세로 편치 않은 숨을 내쉰다. 학생들은 매서운 시선과 빠른 손놀림으로 그 사람의 포즈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멋지게 잡아냈다. 언젠가 어린 철학자는 자신도 그런 모델인 양 벌거벗은 채 교실로 향했다. 그러나 수업때와는 달리 진지하고 탐구적인 눈이 아니라 아이의 엉뚱함에 우스운 손길들이 철학자의 머리를 파도처럼 쓸고 간다. 아빠의 품으로 달려가 부끄러운 눈물을 터뜨려보지만 교실 가득 메운 흑연 향만큼 웃음소리만 짙어진다. 갑작스레 철학자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창 안의 창 속에 세워 둔 이젤 위 얼굴과 그 시절 자신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주인장도 화가였다. 오로지 연필로만 세밀하게 그려가고 있는 어린 딸의 미소에서 젊은 화가의 애정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화가는 흔히 구할 수 없는 연필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온갖 연필들의 연필그림이 빼꼭한 메모와 함께 벽돌색 나무벽 위에 붙어 있다. 철학자는 투명 실린더에 종류별로 담아 둔 연필을 찬찬히 살피다 푸른 계열의 색깔들이 회오리처럼 뭉쳐 있는 색연필 하나를 집어든다. 그리다 말고 할머니 책상에 버려두고 간 손녀의 몽당연필을 바꿔줄 생각이다. 아빠와의 기억을 또 하나 잇게 해 준 새 연필은 손녀의 손에서 다른 미래의 기억을 그려낼 것이다. 철학자는 생각했다.
-몽당연필이면 어때. 네 쓸모를 다했잖아. 그래서 내 책상서 이렇게 편안히 쉬고 있는 거잖아.
철학자는 불편한 오른손으로 몽당연필을 쥐어본다. 그리고 균일하지 못한 선을 천천히 그어가며 이름들을 부른다. 아빠의 이름, 손녀의 이름 그리고 자신의 이름. 서로 다른 자모의 조합이지만 옅게 하나의 파란색으로 이어진 이름들이 공명할 기억의 우주를 손녀에게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