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은숙
아주 요란한 꿈을 꾸었다. 새하얀 배경에 홍게가 가득한 그런 그림이었다. 막 깨어난 아침이 어수선하여 얼른 서고로 가 꿈이야기를 찾아본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텅 빈 무언가가, 키메리우스 가까운 곳에 왕궁과 거처를 두고 있는 꿈이라는 이름의 신이 존재하는 척 흉내를 내고 있다."
수술대 위 오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철학자는 알았다. 말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리고 지난밤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수히 많은 게 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지만 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게의 모습을 한 솜누스가 철학자의 단어들을 모조리 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어의 껍질이라도 하나하나 그러모으려는 철학자에게 토트가 보내온 선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주의 바다 내음에 실려온 아빠를 닮은 화가의 잔상일까.
화가가 남긴 숱한 스케치와 글자들은 아빠와의 기억을 닮았다. 막내딸 철학자와만 특별한 언어를 공유했던 아빠는 연필 대신 흙으로 편지를 썼다. 선반에 줄지어 있는 온갖 토우들은 오로지 철학자만을 위해 창조된 것이었고, 흙으로 빚은 그 아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어린 숨결이었다. 철학자가 부르는 이름은 이미 존재하거나 혹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어차피 이름이란 누군가가 불러주는 것이니까. 이 세상의 모든 단어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여전히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붉은 게가 솜누스로, 토트로, 먼 길 떠난 화가의 이름으로 불려도 무관하다. 그러니 단어를, 의미를 기억해 내는 부담도 조금은 누그러진 듯하다.
오전 내내 철학자를 지배하던 집게발 같은 긴장감을 걷어내고 솜누스의 동굴에서 나와 햇살 좋은 창가로 편한 의자 하나를 끌어 옮긴다. 그리고 화가의 편지 모음을 여유 있게 들추어본다. 몇 페이지를 넘기니 꿈속에서 보았던 게 들이 와글거린다. 멀리 보이는 것은 섶섬인 듯하고 모래사장 주위로 두른 펜스 안팎에서 게들과 태성과 태현-화가의 두 아들-이 즐겁게 씨름을 한다. 곁에 선 화가와 아내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페이지를 넘기니 이런 글귀가 실렸다.
"자기 전에는 반드시 그대들을 떠올리고...
태현 남덕 태성 대향 네 가족의 생활...
행복하게 하나로 녹아든 모습을 그린다오."
철학자에게도 두 아들이 있고 아빠의 옛 이름을 지닌 남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