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을 미메시스적으로 관찰하고 기억하고 써내려 간 작가 둘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들의 서고를 방문할 때면-그것이 기억된 서고이든지 아니면 기록된 서고이든지- 언제나 극단의 인식을 절묘하게 엮어냈던 천재 작가의 문장들을 떠올리게 된다. 둘은 극단의 성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묘하게도 그 이질감이 유사성의 조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사해 보이는 것들의 단서를 따라가 보면 거기엔 쓰기라는 그들만의 고유한 행위가 있다. 고유함이란 각자의 스타일을 의미하는 동시에 흔적을 남기려는 인간 본성에의 성찰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을 넘어 역사적이고 신화적인 것에도 닿아 있는 것, 그것이 쓰기라는 인간 행위인 것이다.
김영기와 차정인이 남긴 쓰기의 흔적도 태고의 미메시스 행위로 해석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흩어진 메모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고, 빛바랜 낱장의 노트 위에 건조하게 뉘인 철자와 형상들이 어느 순간 해독되어야 할 암호문으로 읽혀지기도 했다. 집요한 발굴자가 되어 마침내 극단의 작가들에게서 모종의 근친성을 찾았을 땐, 오랜 미메시스적 읽기 훈련에 내심 뿌듯해했다. 두 개의 서고를 전시 언어로 재현하는 과정에서도 차이와 유사성의 경계를 줄타기하며 비평적 예민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 서고에 파묻혀 흥미로운 텍스트 놀이에 빠질 때도, 끈질기게 기록들의 연관을 분석할 때도 그러했다.
서고로 들어서는 입구엔 삼십여 년 전 필사 행위가 재현 중이다. 그 시기 차정인은 스승의 원고를 매일 일정 분량 원고지에 옮겨 적었고, 그렇게 몸으로 새겨 넣은 문자의 기억을 떠올려 보는 작가의 다시-쓰기는 남성주의적 신화와 맞서 온 삶의 결정적 동기로 이 미메시스 행위를 주목하게 한다. 필사는 벤야민이 관찰했던 바와 같이 베껴 쓰는 이의 영혼과 몸에 지시를 내린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쓰기는 더더욱 그 모방 속에서 텍스트가 작동하는 방식을 은밀하게 주입한다. 결국 재현된 쓰기의 기억이 작가는 물론 독자의 시선을 필사 행위에 관여했던 힘의 원천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가 원시림을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에서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필경사는 문자문화의 비할 바 없는 보증인이며, 필사 즉 베껴 쓰기는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다.
발터 벤야민,「일방통행로」
비단 중국의 필경사만이랴. 필사라는 행위에 관여하는 모든 문자와 영혼이 그러할 텐데, 작가는 이 쓰기 과정에서 중국 문자의 이면 곧 수 세기 여성에게 가해 온 권력의 그림자를 보았다. 일련의 "女字-女子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녀의 쓰기는 사적 행위를 넘어 성씨姓氏가 다른 여자들의 연속적 서사가 되고 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여성과의 연대로 확장되었다.
그녀의 서고 | 심각心覺 한 놀이
오랜 기억 속 그녀와의 첫 만남은 동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공한 디자이너였고 더구나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능력 있는 프리랜서였기에 그러했다. 그리고 몇 해 후 그녀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또다시 개척자가 되어 돌아왔고 성공한 일러스트레이터에 북아트 작가라는 이름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범접조차 어려웠던 그녀가 이 사회 안에서 평범하지만 전능해야 하는 ‘여자’ 임을 알게 된 것은 “모순적이고 자기 분열적 요구들”로 차려낸 책, 『슈퍼우먼 샌드위치』를 읽은 후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내였고 어머니였고 딸이고 며느리였다. 유일하게 알고 있던 작가 차정인 뒤에는 이들 이름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던 것이다. 다행히 이들이 억압된 이름으로 방치되지 않고 그녀의 쓰기를 통해 공공연하게 불릴 때 숨겨지고 편향되었던 권력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적 권력을 꾸준히 내면화해 온 한자는 그녀의 오랜 성찰과 쓰기의 대상이었다. 여고시절 정서로 써내려 간 『한문 노트』는 문자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을 증언하는 동시에 전복적 전향의 힘을 예고한다. 쓰기에 쓰인 사랑과 증오의 변증법.
작가의 초기 일러스트레이션 속 화자들 역시 그러했다. 화자는 언제나 남성이었다. 남성은 곧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였고, 아버지에 대한-현실적으로는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와 인정에 대한- 동경이 그런 대표성으로 자연스럽게 고착화되었을 것이다. 이 이중적 모순을 자각했던 순간은 공교롭게도 스승에게서 위임된 필사의 서고를 떠나 기획한 첫 개인전에서 일어났다. 한 관람자가 남성 작가를 찾는 순간 스스로에게 시작된 질문, -‘도대체 내 안에 누가 있는 거야?’- 이로부터 작가의 쓰기는 "영혼에 지시를 내리는" 텍스트와의 긴장을 언제나 내재하게 되었다. 일상의 기록에도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여전히 베껴 쓴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해체된 텍스트들의 몽타주가 삽입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내적 긴장은 갖가지 형태와 구조의 책으로 재창조된다. 때론 놀이처럼, 때론 고독한 전투처럼 구축한 텍스트의 집은 온갖 모순된 삶의 경험들을 이야기하듯 전달한다. 경제적 이유로, 외부의 요구로 생산한 그림책에서 오로지 자기 안의 이야기를 풀어가며 소통했던 아티스트 북까지, 작가의 서고는 그처럼 “삶의 직물 속에 짜인” 텍스트로 채워져 있다.
그중 유독 관심을 끄는 손바닥 크기의 상자 책. 베껴 쓰며 스스로를 통제하고 또 해방시킨 女字 이야기의 모티프가 된 이 책은 흡사 모자이크처럼 조각조각의 활자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잇는 이야기 모음집이다. 독자는 보름간 만나는 철자들의 부딪힘 속에서 작가의 경험적 조언을 되새긴다. 까다롭게 그리고 찬찬히 女字에 결합된 활자들을 걷어내다 문득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걷는 '나'를 만나기도 한다. 의식하지 못한 채 불렸던 그 이름을 규정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주는 것, 그래서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쓰기에서 얻은 지혜요 깨달음인 것이다.
[그녀의 서고]는 독자에게도 사소한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마음의 각성 곧 心覺한 놀이를 유도한다. 그래서일까. 벤야민의 지시대로 텍스트의 "눈송이들 속으로 무한한 신뢰를 갖고 걸어 들어”가야만 작가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 그러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 온몸은 방금 읽은 것으로 흠뻑 덮여” 있게 된다. 무엇보다 유년 시절 아버지의 서고와 학창 시절 스승의 서고에 빠져 있던 작가를 스스로 모방하는 행위는, 텍스트의 영혼으로부터 구원해내는 것에 관한 이중적 미메시스를 암시한다. 필사의 재현과 그 쓰기의 대상이었던 스승의 자기 필사가 공명하도록 두 서고를 함께 배치한 것도 텍스트의 마법을 탈마법화하려는 일종의 비평적 장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