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서고 | 개념의 지도
낱장에 흩어진 사유의 기록들을 벽면 한가득 공간적으로 채워 볼 수 있도록 김영기는 스스로의 텍스트 조각들을 정서해 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전지 두 장의 미메시스적 쓰기. 벤야민은 그런 시간을 직감이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했는데, 스스로를 모방해 보는 이 두 번째 쓰기가 작가에게는 무의식적 습관을 의식意識해보는 특별한 의식儀式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기억은 언제나 타자화된 역사와 맞닿아 있었다. 그것은 타자에 의한 상처와 손실의 역사이기에 쓰기의 매 순간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작가는 장場 바깥에서 다루는 이단적 담론들을 쫓거나 혹은 그 생산의 주체라는 오해를 감수해야 했다. 동시대의 디자이너들조차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학창 시절 온통 전통과 문화의 형상에 관심을 쏟았던 그에게 오래된 사물들에게서 느끼는 근친성은 사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과 조우하게 하는 창조적 매개였다. 반 세기가 넘도록 그가 남긴 읽기와 쓰기의 목록은 그 이단적-이라 평가된- 경험의 방대한 서고라 할 만하다.
읽기에 관한 위험한 기억 또한 그 시대의 아픈 흔적이다. 책 한 권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원서를 얻고자 미군 도서관에서 무단으로 반출하는 불법 행위가 음성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알 만한 출판사들이 그 창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개인이 합법적으로 원서를 받아 보는 것도 수개월을 기다려야만 했는데, 당시 유네스코에서 발행한 쿠폰은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던 작가에게는 또 다른 서고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였다. 시공간의 장벽을 뚫고 광범위하고 빠르게 소통하는 현재적 네트워크 환경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억의 잔재가 그의 서고에 빼곡히 쌓여 있다.
작가는 여느 수행자처럼 오랜 기다림 후에야 텍스트로 난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그 길에 서면 굶주린 포식자와 같이 텍스트를 삼켜 버렸다. 서고 한편을 가득 채운 메모들이 바로 그 증거다. 그의 시선과 손, 그리고 펜 끝에 닳은 책장을 넘기며 문자들 사이를 걷다 보면 등을 내보이며 독자의 시선을 끄는 낱말들이 때로는 유사하게 때로는 극단적으로 서로 호응한다. 그 낱말 맞추기를 즐겨 보는 것도 그의 서고를 경험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말풍선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개념의 지도는 그 같은 놀이의 영감 어린 안내서와 같다. 저자만의 색인카드인 단어들의 배열이 그 원래의 의미론적 장소를 이탈하여 전혀 낯선 맥락으로 재 형상화되는 과정은 마치 벤야민의 유년시절 유령이 되어 접시와 호수 등에서 갑자기 드러내 보였던 ‘무메레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낱말과 낱말 사이의 비의적 교차는 문장의 형刑에 맞선 아주 소극적인 저항이었을지 모른다. 타자화된 기억과 그에 따른 배타성의 질서를 깨뜨리고 왜곡시키는 작가의 쓰기는 비록 그의 시대, 그의 동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지만 현재적 독자에게는 세계와 사태의 이면으로 이끄는 우회로가 되어준다.
[그의 서고]는 연대기적인 것과 성좌적인 것이 결합된 공간이다. 먼지와 함께 켜켜이 쌓아온 기록의 보관은 연속적이지만 그로부터 생성된 기억의 쓰기는 비연속적으로 배열된다. 나이 듦으로 잊어가는 읽기의 시간을 자유스러운 필체로 멈춰 서게 하는 상이한 낱말들의 묶음이 매번 새로운 연관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용과 장식의 망으로 표현되는 트락타트나 모자이크와의 비유처럼, 작가의 서고는 의미의 충돌, 단어의 왜곡,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순간의 이미지가 뒤섞인 ‘고요한’ 용광로다. 성가신 논쟁을 피해 찾은 텍스트의 은신처는 그렇게 스스로를 논쟁적 소음의 기지로 삼는다. 물론 그 소음은 충분히 생산적이고 언제나 새로움을 동반한다.
우회로서의 재현, 이것이 트락타트의 방법적 성격이다. 의도의 부단한 진행을 포기하는 것이 트락타트의 제일의 특징이다. 사유는 끈기 있게 항상 새로이 시작하며, 사태 자체로 집요하게 돌아간다. 이러한 부단한 숨 고르기가 정관의 가장 고유한 존재형태이다. 왜냐하면 정관은 어떤 동일한 대상을 관찰할 때 여러 상이한 의미층을 쫓는 가운데 자신의 항상 새로운 출발의 추진력을 얻고, 자신의 단속적 리듬의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불규칙한 조각들로 분할되는데도 모자이크가 장엄함을 드러내듯이 철학적 관찰은 비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자이크는 개별적이고 동떨어진 것들이 모여 나타난다. 초월적 힘을, 그것이 성상이 지닌 힘이든 진리가 지닌 힘이든 이보다 더 강력하게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인식비판적 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