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집
숨겨진 언어를 찾아가는 오래된 미메시스의 서고에 머물며 차정인은 독특한 시각적 연관에 관한 최초의 독자가 되었다. 양극의 사유는 그녀의 필사를 통해 미메시스적으로 읽혔다. 미메시스의 힘은 종국에 그 마법적 힘을 깨트리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녀의 읽기에서도 유사성을 강제하는 바로 그 힘에 대한 “파괴적 성격”을 감지할 수 있다. 필사 행위는 적어도 수개월간 반복해야 할 그녀 ‘자신의 일’이었고 창조적인 작업과도 무관해 보이기에 벤야민을 매료했던 그와 같은 성격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벤야민의 묘사에 기대어 부연하자면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며 다만 자연으로부터 속도감을 얻고, 텅 빈 공간을 보며 잠시 머물기도 하고, 굳이 이해받으려 하지도 않는 점"이 그러하다. 그리고 미메시스적 읽기에 잠재된 이 “고상한” 파괴력은 마침내 다양한 형식의 쓰기로 변주된다. 무엇보다 추상된 알파벳과 다른 계열의 기호를 탐색하며 자신의 삶을 강제한 문자의 권력을 비판한다.
나는 국한문 혼용 세대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고전을 배우고, 한문 시간이 따로 있었다. 학교에서는 논리적 글쓰기 훈련이 된다 하여 한자가 섞인 신문 사설을 읽게 하였다. 나에게는 한자가 낯설지 않고 고전과 한문 과목을 좋아했던 나의 사고 속에는 한자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막연한 추측과 호기심에 계집女부를 포함한 글자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추측보다 더 현실감 있는 문자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집女가 붙어 본래의 뜻과 다르게 사회적 성, 젠더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듯 변해 버리는 글자들. 그것들로 상자 책을 만들었다.
차정인,『여자 공부』, 다다르다 창작 풀판 03, 2014(미간행)
언어의 형식, 형식의 언어 | Artists Books
그녀의 텍스트는 언제나 형식과 함께 읽힌다. 『MAZE』와 같이 낱낱의 단어가 연상케 하는 의미가 있지만 또한 접힘과 펼침을 반복하며 이 단어들이 공명해내는 형식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있다. 그래서 책은 반드시 손으로 보고 읽어야 한다. 지면에 놓인 평면적 사진으로는 손으로 읽으며 만들어가는 내러티브를 결코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서고 위에 세워 둔 그녀의 책을 꺼내 들어 읽을 때면 점자를 읽듯 종이를 넘기고 뒤집고 펼치고 접는 다양한 손의 행위들로 이미지와 문자들의 소리를 듣게 된다.
병풍 형태로 접힌 『An Outdoor Man/An Indoor Woman』은 반복되는 부부의 일상을 안과 밖의 구조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바깥 책 등에서 시작되는 한 남자의 일과를 따라갈 때 안쪽 공간에서는 여자와 아이의 바쁜 하루가 동시적으로 지나간다. 출근길, 문을 나서며 인사하는 부부는 하루 중 오직 한 번 마주할 뿐이다. 그리고 열린 문의 ‘바깥일’과 닫힌 문의 ‘안에 일’은 이질적인 내러티브로 개별적 삶의 공간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마무리된다. 텍스트 없이 이미지로만 써내려 간 이 폴더 북에서 작가는 의식하지 못했던 가족의 형식에 질문을 던져본다. “하나의 책의 다른 면에 위치한 커플들의 반복되는 일상, 이들은 ‘함께’인가, ‘따로’인가?”
그녀의 쓰기에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형식 언어는 실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묘사된 실의 스토리는 『A Piece of String』으로 제작되었다. 하나의 실이 줄 넘는 아이들의 놀이 기구가 되기도 하고 전선줄에 열 지어 앉은 새소리에 귀 기울이게도 한다. 좌우 페이지에 따라 실의 형태에 변화를 주며 『Changing Frame』으로 안-밖의 관계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접지에 따라 드러나는 실과 숨겨진 실로 가족관계를 말하는 『Love/Blood Ⅰ·Ⅱ』 역시 독특한 형식 언어를 취하고 있다. 접고 펼치고, 묶고 자르고, 오려내고 붙이고, 다양한 기법들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확장해갔다. 그리고 그 언어는 설명 없이-혹은 통역 없이도- 작가와 독자를 연결해 주었다.
독특한 구조와 서사의 책은 런던 캠버웰 컬리지 북아트 과정에서 처음으로 작업하고 읽혀졌다. 주어진 텍스트에 ‘관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직업적 한계에 부딪히며 고민을 거듭하던 작가는 다른 언어와 사회적 경험이 이끄는 대로 새로운 표현의 세계를 탐색해갔던 것이다. 그 실험적 시도는 다양한 문화권의 작가들에게도 공감되었고, 특히 여성 작가들이 직관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이야기의 세계는 언어적 소통을 넘어선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상이한 언어의 간극을 좁히고자 내면적 작업을 미처 설명하기도 전에 시각 텍스트가 즉각 스스로를 발언해주었던 경험을 작가는 기억한다. 본격적인 여자女字공부로 들어서게 만든 그녀의 상자 책, 『Who made the characters of woman?』과 관련한 일화에도 그 같은 읽기의 기억이 스쳐 간다.
에피소드 02 데일리메일 지의 카투니스트, 케네스 마후드가 캠버웰 컬리지 북아트 졸업전시를 방문했다. 그는 작가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읽기로 접힌 종이상자를 한 겹 한 겹 열어가며 상형문자 ‘女’ 자의 사회학을 해독해냈다. 그리고 작가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형식의 감각을 귀띔해 주었다. 상자 책은 구조적일 뿐 아니라 촉각적이고 또한 손 끝으로 조심스럽게 펼치는 행위가 대단히 성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작가의 작업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으며 형식의 언어를 확장하는데도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작가에게 형식은 닫힌 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녀의 생각을 열고 내러티브를 이어가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때 자투리 종이나 천, 신문지 조각들, 나뭇가지, 팔레트에 남은 물감 덩어리, 오래된 영수증은 “이질적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 아이들의 놀이처럼 그녀만의 형식을 만들어내는데 다양하게 활용된다. 벤야민이 더 이상 쓸모없는 폐기물에서 사물의 “얼굴”을 보는 아이들의 미메시스 능력을 읽었다면, 잡다하고 사소한 일상의 재료로 언어의 형식을 짓는 그녀는 기호화된 언어의 집에 갇혀 잊고 지낸 그 능력을 다시금 일깨운다. 스스로 “심각한 놀이”라 명명했던 모든 쓰기의 실천이 미메시스적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런던에서 시작된 작가의 노트는 그 같은 쓰기를 위한 방대한 수집물이 되었다. 옮겨 쓴 텍스트와 작가의 단상들, 그때그때의 재료들로 그려낸 자유로운 스케치, 전시 또는 공연 티켓과 관람 기록들, 타국에서 함께 보내는 가족들의 일상, 주위를 탐색하는 어린 딸을 곁에 두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빠르게 수집하려는 시선과 손놀림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한번 손에 쥔 것은 놓칠 줄 모르는 아이처럼 노트에 수집해 놓은 것들이 책의 형식으로 새롭게 구성될 때면 기록된 기억은 현시점에서 전혀 낯선 맥락과 예기치 않은 공명을 일으킨다. 예컨대 자주 지면으로 활용되는 신문과 잡지의 문구들은 그 위에 써 내려간 작가의 문자들과 우연하게도 어떤 유사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인쇄된 문자와 필서의 이미지가 충돌하며 생성하는 시각적 즐거움만큼 각기 배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어들이 맺는 상이한 연관의 형식 또한 주목을 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가 계시되는 장소인 듯 비의적으로 읽혀 지기를 기다린다. 물론 접고 펼치는 형식 곳곳에서 마주하는 모순의 병치도 그와 같은 읽기를 자극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중적인 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작가의 감각은 어쩌면 오랜 쓰기의 경험과 훈련이 낳은 무의식적인 신경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신체가 직조한 언어의 형식은 자주 모순되고 이질적이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것이다.
여자의 공간 | Woman’s Space
‘내 안의 나’를 찾아 떠나온 작가의 쓰기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온갖 이름들로 둘러싸인 『여자女字의 공간』을 지어가고 있었다. 그 공간은 세대를 잇는 기억과 소망이 이중적으로 교차하는 곳이다. 엄마를 통해 학습된 여자女의 역할과 태도가 문자적 기능을 넘어 자기 검열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딸을 통해 각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의 사랑은 그녀 안에서 그렇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고 그 극단들의 균형을 찾기 위해 일련의 글자 女字 쓰기로 여자 공부를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론적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전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쓰기로 여성에 관한 사회적 담론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공간은 인쇄된 책 속에 가만히 소극적으로 눕혀 있던 여자女字의 결합체들을 직립으로 세워 보인다. 책의 문자가 소리 없이 시선과 사유를 강제하는 것과 달리, 신체적 규모로 마주 대하는 이 수직의 문자는 오히려 그것을 응시하고 그것이 부여하는 의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게 한다. 전신 노동으로 써 내려간 서른 개의 문자엔 정작 여자女字가 빠져 있다. 거대한 텍스트의 공간을 거닐며 문자의 사회학이 강제하는 여성성 속에 나를 맞춰갈 것인가, 아니면 부수 女를 뺀 독립적 문자와 대등하게 마주하고 서 자신만의 공간과 의미를 생성 해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야외에 설치된 서른 개 문자의 첫 공간은 바람과 빛 그리고 비의 흔적이 차곡차곡 내려앉아 여자의 세월에 자연의 리듬을 더한다. 비계 구조물이 이들 문자의 일생을 지탱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강력한 통제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자연의 기록이 그 단단함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십 년 후 낡은 시약 창고 안에 마련된 두 번째 여자의 공간, 그것은 이 비련한 문자의 과거처럼 설치 과정 내내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축약되고 닫힌 공간 안에서 여자女字의 쓰기가 지닌 미메시스적 힘의 파괴력은 한층 더 강화된다. 책 형식의 변주와 같이 작가는 그렇게 자연과 인위, 기호적인 것과 미메시스적인 것, 안과 밖의 이중성으로 문자의 기억을 공간화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역할 분담을 요구했던 엄마의 시대에, 천을 마름질하고 다루는 일은 여성의 몫이었으며 그것은 일종의 여성적 쓰기 영역에 속했다. 반면 먹을 갈고 문자를 다루는 일은 남성의 영역이었고 그 금단의 쓰기 공간을 여성인 작가는 끊임없이 기웃거렸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구분되었던 엄마와 아빠의 쓰기를 그녀의 일생동안 모방하고 실험하고 또 자기 시대의 언어로 번안해 오면서 『여자女字의 공간』은 자연스럽게 양가성의 공간이 되었다. 어쩌면 이 극단의 쓰기가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묶여 있던 샌드위치 북의 피학적 자기부정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가는 보다 적극적으로 여자女字의 계열체들을 변주해가며 자유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꽃밭 만들기』도, 『여자 인형』도 그러한 공간적 진화에 공명하는 쓰기의 일환이다. 오랜 관습과 기억에서 떨어져 나온 문자는 이제 인형이 되어 스스로를 발언한다. 누군가에게 줘버린 손, 그렇게 손 없는 인형들은 그 누군가를 위해 ‘쓰인’ 작가, 엄마 그리고 아내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나의 인형은 자존감이 없는 상태로 여기저기에 손을 다 주어 버리고
몸통만 남은 모습이다. 두리뭉실한 몸매에 앞치마를 두르고
무표정(한 채) 손은 없고 발은 이 곳 저곳으로 갈 준비를 하거나
안절부절못하거나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에 순종하는 듯 서 있는 인형들.
평생 그녀는 손을 썼고 그리고 글을 썼다. 때로는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때로는 타인을 위해 내어 준 그 손이 엄마가 남겨준 자투리 천을 입고 그녀의 서고로 되돌아온 것이다. 더 이상 문자적 사회가 요구했던 예쁘거나 착한 여자로 보여 지기를 거부하고 중용과 너그러움의 형상으로 담담하게 자기를 표현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에둘러 왔다. 그 세월만큼의 인형을 꿰매고 솜을 넣어가며 작가는 한동안 부정해온 엄마의 쓰기를 이해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세대의 쓰기를 병치해 둔 서고 속 서고에서 여자女字는 어디에도 기대지 않은 채 스스로의 이름을 불러보는 꿈을 꾼다. 필묵의 쓰기에 억압되었던 문자는 각양 이름의 색으로 입혀지고 본래적 기능이었던 아름다운 쓰기 곧 칼리그램의 기억을 되찾는다.
에피소드 03 파리의 한 갤러리에 작가의 문자가 초대되었고, 또 한 번 여자女字의 변주가 더해졌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문자는 뒤집어 배접하여 읽히지 않도록 배치되었다. 물론 이방인에게 이 이국적 문자는 처음부터 불가해한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쓰인 기호를 해독하려면 누구든지 지금의 형식을 해체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끊임없이 감춰둔 이미지 혹은 문자를 읽고자 시도하였다. 읽기의 관습이 그러한 행동을 유도하듯, 수 세월 학습해온 문자의 의미와 그것에 구속된 삶의 형태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래서 작가는 이중의 잠금장치를 해 둔 것이다. 책 입구에 “Do not turn it over. It’s not valid anymore.”이라 강조해 두었고, 다시 그 내부에서 붉은색으로 리플레이 기호를 낙인하여 “이 문자들을 제대로 보려고 뒤집는 시도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것”임을 경고한다. 그리고 몇 년 후, 봉인된 여자女字는 무명無名의 인형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