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로 돌아온 후
버지니아 울프처럼
아주 오랜 세월 혼자만의 방을 갖고 싶었던 그녀,
그녀의 서고에서 풀려 나온 온갖 이름들은
육십의 세월을 돌아가는 길목에 이정표처럼 섰다.
그리고 길을 묻는 내게,
그 이름은 길잡이 별이 되어 주었다.
언제부턴가 이름의 신비를 알고 싶었다.
벤야민이 그리워한 이름의 태고를 찾아가던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나이만큼 낳은 이름 없는 인형과 함께.
그녀의 방을 기웃거린다.
방 안엔 온통 옛 물건들로 가득하다.
눈에 띄고, 나를 사로잡은 것, 그것은 먼저 활자들이었다.
그 활자들에게서 인형들이 태어났다.
빛바랜 활자에는 엄마의 기억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엄마는 여자였다.
그 글자(女)에는 이름이 없었다. 오직 그 글자에 또 다른 글자들이 붙어
여자의 일생을 만들었다. 이름과 함께 엄마의 손도 사라졌다.
일생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살면서 손도 달아나버린 것이다.
옛 마을의 들판 한가운데 외로이 섰던 고목나무처럼,
여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먼 기억만을 남기고
이름 없이 늙어가고 사라졌다.
그 기억의 조각들을 한 땀 한 땀 이으며
활자를 찍듯 잊혀진 이름 석 자를 또렷하게 불러본다.
한 자, 한 자, 그렇게 육십의 여자(女字)가 무덤을 쌓은 후,
인형을 둘러싸고 있던 활자의 집은 해체되고
불리고 싶던 그 이름으로 부활한 여자는 이야기한다.
"누가 여자라는 글자를 만들었지?"
_이름을 되찾은 여자들을 위하여
수년 전 작가의 서고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나는 수없이 묻고 기록했다. 작가의 쓰기를 지탱하고 있는 『여자女字 공부』를 탐독하기 위해 그녀가 걸었던 템즈강 변을 따라 걷기도 했다. 런던은 그녀가 사랑한 버지니아 울프의 통행로이기도 하다. 낯선 도시에 머물렀던 그 열흘 간의 기억이 내게는 잘 알고 지내던 작가를 색다르게 만나보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페테 한트케가 세잔의 생 빅투아르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듯이 나도 그녀의 발걸음을 그대로 모방하진 않았다. 미리 건네받은 옛 스케치들을 마음에 담고서, 그저 '그때 내가 런던 어딘가에서 그녀를 만난다면?'을 가정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작된 상상의 도보가 작가의 쓰기를 나의 신체 속 안감으로 밀착시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유럽으로 돌아온 후, 나는 매일매일 활자가 필요했다." 세잔의 가르침을 여는 첫 문장은 유럽에서 돌아온 나에게 활자들을 일으켜 세워 쓰기의 집을 재현할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두 달을 준비해 전시를 열였고, 그때의 활자들이 지금은 다양한 신체들의 결합에서 떨어져 나와 지면 위에 다시 잠들어있다. 이름을 되찾은 인형들처럼 또 한 번 활자들이 깨어나길 기대하며 나는 오랜 서고의 발굴자로 돌아가 먼지 앉은 활자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문장 하나를 신중하게 옮겨 적는다.
사물-그림-문자가 하나라는 이런 전례는 없었다.
그림 앞에서 느끼는 한트케의 이런 “가까움”은, 사물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활자가 되고 쓰기의 흔적이 남겨 놓은 것에서 어떤 존재가 생성되기도 하고 그리고 다시 이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로 환원되는 연기緣起같은 것이었다. 아무 매개 장치도 없는 직접적인 연결, 누구보다도 벤야민에게 뛰어났던 그런 유의 각성이 나에게도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곱씹은 한트케의 문장들을 챙겨 널디 너른 평사리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초록 짙은 여름, 저 멀리 대지를 조망할 고원을 찾아 오르는 길은 프랑스 남부의 산을 오르는 것 못지않게 힘겨웠다. 가끔은 대나무 숲이 흘려보내는 바람소리에 그저 소리로만 더위를 식혀 보지만 잘 다듬어 놓은 흙길엔 햇빛 가릴 그늘이 없으니 이마에 흐르는 땀은 식을 줄을 모른다. 굽이 없는 오르막을 한참 걷는 데 노랑나비 한쌍이 동행하며 무덥고 지루한 길에 리듬을 더한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무릎 높이의 관목 사이를 누비며 몸을 숨겼다 내보였다 반복하는 것이 숨바꼭질하자며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다.
낡은 나무 이정표 앞에 다다랐을 때 아쉬움을 전하며 그네들과 이별했다. 나는 갈림길 오른편으로 그리고 나비들은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정표는 소박했고, 그렇게 소란스럽지 않은 재질과 글자가 맘에 들었다. 나무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은 낮은 돌담도 대작가의 서고로 들어서는 방문객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데 한몫한다. 서고 입구에는 너른 나무 벽이 세로결로 서있고 그 표면에 하얀색 글자들을 칠해 두었다. 이중문을 열고 처음 만나는 작가의 문장은 강렬했으나 새기지 않은 글은 쉬이 벗겨질 테니 그것이 아쉬웠다.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가로 원고지를 길게 세워 세로로 써 내려간 육필 원고와 가지런히 진열해 둔 인쇄본 책, 사전과 안경과 펜의 유리진열장을 둘러보고 뒤돌아선 하얀 벽에는 연필로 세밀하게 그려낸 인물화 한 점이 옅은 미송 액자에 담겨 조명을 받고 있다. 작가의 글기둥 하나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들이 화가의 손으로 형상을 지니게 된 것이 새삼 놀랍다. 처음부터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던 이 형상들은 무명無名의 인형들과는 다른 생을 부여받았다. 먼저 문자화된 이름이 있었고, 그 이름에 어울릴법한 형상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정성스레 쌓아 올린 화가의 흑연이 그 어원에 충실하게 작가의 쓰기 graphein를 재현한 것이다. 미세하게 번져 나오는 상상적 군상의 떨림 앞에서 권위적 문자에 그 이름자 한 획도 드러낼 수 없었던 여자女字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수 세월 억압하고 폭력적이었던 텍스트의 집을 해체하고 나오면서 명명했던 조각천 인형들을 이 흑백의 형상들 사이에 세워본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던 평사리의 이름들이 작가의 획에서 화가의 선으로 옮겨져 또 다른 생을 얻은 것처럼, 이제는 되찾은 이름으로 자기 생을 살아갈 여자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 듯하다.
한 여름, 형상의 언어와 이름 언어가 빚어내는 이 특별한 경험은 벤야민의 유사성의 감각 곧 비감각적 유사성으로 내게 주어졌다. 그것은 언어와 쓰기가 기대고 있는 상이한 감각 체계의 이질적이고 역설적인 결합에 관한 오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혹은 피카소의 열망이 내게 들러붙어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변형해 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서고로 돌아온 나는 언어적 설명이 이미지를 대변하거나 그 역의 보충이라는 낡은 생각을 당장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못내 아쉬웠던 작가의 하얀 글자들을 벗겨 내고 그곳에 나의 글기둥 하나를 새겨본다. "미메시스적으로 읽기" 마음으로 새긴 문장은 평사리 오르막길에 내딛던 그 걸음으로 서고의 쓰인 획 사이를 떠돌게 한다. 문득, 한쌍의 나비는 이런 계시적 비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을 가로지르는 미메시스의 순간을 깨닫게 하는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