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장부

숫자들과 잃어버린 영혼의 이야기

by 미정의 서

언제부터인가 필사가 습관이 되었다. 책을 읽다가 집중이 되지 않을 때 베껴 쓰기, 누구나 그렇듯 좋은 문장을 보았을 때 옮겨 적기, 그리고 놀이하듯 다른 문장들을 뒤섞어 연결해보는 일을 수없이 반복한다. 한트케가 세잔에게서 그리고 배운 것처럼, 필사의 영혼들은 나에게 활자들과 형상들에게서 깨닫고 상상하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올가 토카르축의 단편 『잃어버린 영혼 zgubiona dusza』도 그런 미메시스적 읽기의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사실 그것은 필연이었다. 짧은 이야기의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면 어김없이 인형들의 작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빛바랜 종이 위에 세밀하면서도 초현실적으로 그려 낸, 어딘가 모르게 녹청의 담벼락 위 담쟁이넝쿨을 닮은 듯한 기억의 실타래는, 이름 없는 인형들의 자궁이 되어 준 낡은 가계부와 맞닿아 있었다.


미메시스의 서고 한 켠, 조그맣게 마련해 두었던 진열장 어디쯤 문고판 크기의 책 한 권이 형형색색의 인형들에 가리워 잠들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작가의 애정 어린 설명이 곁들고서야 제대로 시선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책은 엄마의 유품인 가계부 위에 작가가 그려낸 살림 기도집이었다. 문자라 하기엔 너무나 그림 같은, 갑골문의 형상처럼 혹은 우아크냉의 사물 문자처럼 살림할 때의 자세와 호흡을 절도 있는 획으로 옮겨낸 이 기도문을 접하기 전, ‘살림’이라는 단어를 그처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살림은 문자 그대로 주변의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그런 위대한 일을 그저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위의 언어가 가지런한 숫자들의 배열 위에 그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감정이 삭제된 가장 객관적인 문자인 숫자가 아주 사적인 영역의 회계장부를 가득 채우고, 그 위로 흐르는 기도문의 획 역시 소망, 아픔, 기쁨, 회한 따위는 삭힌 채 건조한 묵색으로 기계적 일상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경제적 카오스의 잔인한 타율성의 지배”를 뚫고 나온 광고적 문자들의 기원을 말라르메 시에서 찾았고, 그와 유사하게 작가는 엄마의 낡은 회계장부 속 숫자들을 시적으로 환생케 한다. 숫자 속에 각인된 엄마의 일상은 온통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 또한 지나친 타율성의 증거들이었고, 작가는 그 숫자들의 격자를 가로지르며 기도의 칼리그람으로 엄마를 노래한다. 살림의 획은 그렇게 살림의 숫자들과 함께 상이한 시간층의 기억을 성좌적으로 드러내며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 중이다.

죽은 숫자들을 살려낸 『엄마의 가계부』는 마치 다른 언어의 번역본인 양 『잃어버린 영혼』의 귀환과 호응한다. 흥미롭게도 이 두 이야기를 매개하는 것은 숫자들을 위한 노트다. 올가 토가르축의 텍스트와 자신의 이미지들이 공명하도록 요안나 콘세이요는 서사적, 질료적 소재를 선택하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회고한다. 기다림 끝에 획득한 매체는 회계장부였다. 벼룩시장에서 얻은 옛 장부는 회계를 싫어하는 그녀에게 오히려 매혹적인 매체가 되어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도왔다. 숫자라는 “문자의 메뚜기떼”-정말이지 그것은 파라오의 시대와 같은 재앙이다-가 주인공의 영혼을 앗아갔다면, 요안나는 이 강력한 그리드의 권력에게서 영혼을 되찾아주는 산파가 된 것이다. 문자적 권력을 비틀어 무수한 女字들의 이름을 되찾아 준 인형들처럼 그리고 무미건조한 숫자들을 가로지르는 살림字처럼,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는” 그래서 이름마저 잊은 어떤 남자의 이야기도 그 자신을 앗아간 바로 그 대지-회계장부- 위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읽기란 대체로 선조적이다. 글줄을 따라 페이지를 넘기며 그림과 함께 문자들을 이해한다. 그런데 『잃어버린 영혼』은 입구부터가 독특했다. 덩어리로 지면을 채우고 있는 활자들. 하지만 그 덩어리의 질량이 느껴지지 않는다. 요안나의 연필선-그녀는 이 주인공을 묘사하기 위해 아주 평범한 샤프를 이용했다- 정도의 밀도를 가진 문자 더미는 한숨 불어내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문자들을 붙잡고 있는 것은 격자의 대지였다. 오랜 회계장부라 페이지를 떼어낼 수 없게 장마다 숫자가 인쇄되어 있는 격자형의 종이는 혹 흩어질지 모를 활자들의 영혼을 조심스럽게 붙들고 있다. 남자에게 영혼을 되찾도록 처방을 내어준 여의사처럼. 올가의 활자는 이름을 잃은 이 남자를 요안나에게로 안내하고, 속도와 양이 강제하고 있는 영혼의 격자에서 요안나의 필선은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줄 것만 같다. 그렇게 그녀의 이미지 서사를 끌고 가는 "끈의 끝"을 쫓아 이 남자의 영혼-실은 그 영혼은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다-을 만나는 시선의 호흡은, 하염없이 더디며 때로는 우회적이다. 페이지는 익숙한 직선대로를 따르지 않고 반복적으로 거꾸로 돌아가게 만든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언제인가부터 영혼의 속도와 육체의 속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의 눈과 손도 격자의 공간 한가운데 앉은 남자의 기다림에 맞춰 페이지들의 서사를 우회하며 "랩소디적"으로 기억의 이미지를 떠올려야 한다. 그 리듬에 어울리려는 듯, 회계장부의 숫자들도 배열의 규격을 벗어나 탈주한다. "... i poczekac", 그리고 기다린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자라고 식물들의 이름을 알아가고 숫자들이 사라지고 나타나기까지 기다리던 "어느 오후", "드디어!"하고 영혼이 도착했다. 기다림의 등에 가리웠던 남자의 얼굴이 머리카락처럼 자라 오른 호박 넝쿨 사이로 영혼과 마주하는 순간, 아주 강렬하게, 한 문장이 스친다. "Je ne suis rien." 지나가던 소나기를 피해 선 카페 테라스에서 패트릭 모디아노의 주인공이 어둠 속에 던진 첫 행이다. 그 역시 잃어버린 이름을 찾고 있었다. "얀 Jan"의 얼굴에서 "기 Guy"의 문자들을 떠올린 것은 이 이름들의 어원이나 음성적 자질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망각의 유사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거대한 통계적 기호들에 떠밀려 이름조차 잊은 세대의 영혼들이라면 한 번쯤은 만나게 될 이름들이다. 그렇게 요안나 콘세이요는 신중하게 찾은 낡은 회계장부와 옅은 흑연의 선 끝으로 잃어버린 영혼의 이름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IMG_4721.jpg 올가 토가르축, 요안나 콘세이요, 『잃어버린 영혼 zgubiona dusza』,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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