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정원

보이지 않는 이름들의 정원

by 미정의 서

얀의 정원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기다림의 속도만큼 더디게만 입혀지던 식물의 빛들이 뒤늦게 찾아온 영혼과 함께 문자 그대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담배 연기에 천천히 내리는 차 한잔의 소리가 시계의 째깍거림을 멈춰 세우고 처음으로 나의 시선이 기이하게 자란 식물들로 향했을 때, 얀이 기다리고 있는 영혼이 내게는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식물들의 이름을 나는 단 한 자도 떠올리지 못했다.


신은 정원을 거닐며 곳곳에 심어 둔 식물에게로 나를 이끈다.
내가 부를 때 그것은 그 이름이 된다. 창세기 2.19


나는 식물들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게다가 잘 외워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 나름의 이름을 붙여 특별한 것들을 기억하곤 한다. 예를 들어, 알리움은 봉봉이, 노엘 꽃, 개구리밥, 잔디 꽃, 방울꽃처럼 유사한 형태들을 가져다 그것들을 명명한다.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면 금방 그 이름을 알 수 있으련만 그조차도 시도하지 않는 건 길고 어려운 학명이 식물학자가 아닌 이상 굳이 기억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안나의 식물들이 나의 무지 아니면 오만에 일침을 놓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리고 기다린다”는 내게 “이름을 불러줘”로 번역되었다. 당혹스러웠다. 회계장부의 숫자마저 사라진 페이지에 멈춰 서서 누런 격자 지면을 뚫고 올라온 식물들을 뚫어지게 쏘아본 들 도무지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이지 정원사의 상상력을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 곧 소나기가 내릴 것만 같은 여름날 오후, 남산로를 오르는 골목은 대단히 가팔랐다. 한트케가 활자들을 찾아 오르던 유럽의 언덕들이 이러했을까. 얀이 가만히 앉아 기다리던 것들을 나는 이 언덕을 숨차게 오르며 찾아왔다. 격자형 노트처럼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는 도심의 옛 건물들 사이로 70년대 적조 양식 건물 한 면이 나타난다. 쉬이 입구를 찾지 못해 우연히 만난 쪽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가니 꽤 긴 복도가 오랜 사옥을 개조한 전시장 내부로 나를 이끈다. 낡은 담벼락이 눈앞에 드러났을 때, 요안나의 회색 톤 식물들이 그 위로 펼쳐지는 상상력이 막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징조가 나쁘진 않다. 무너진 담벼락을 그대로 살려낸 정원사는 그 아래 절로 자라는 이끼들과 세 손가락을 가진 가느다란 활엽수 몇 그루를 심어 두었는데, 그 장면이 꼭 영혼을 기다리는 얀의 방과 닮아 있었다. 거기 서서 벽 위로 난 작은 구멍을 한참 올려다보며 어떤 의식을 치른다. ‘잃어버린 이름들을 만나게 해 줘.’

정원은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원경과 근경, 안과 바깥이 뒤섞여 있어, 마치 우회하던 요안나의 지면 속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정원 만들기 Gardening (piknic)>의 계단을 따라 오르던 중 낯선 기호들의 패널 앞에 멈춰 섰다. 정원사가 그려낸 설계도면이 여느 상점의 상품들처럼 레일을 타고 걸려 있다. 패널 한 장 한 장을 밀어가면서 이 뜻 모를 기호들이 내뱉고 있는 소리들에 가만히 주목하다가 갑자기 ‘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마치 화학 표식 같은 그 기호들은 다름 아닌 정원사가 불러낸 식물들의 이름이었다. 그에게는 굳이 꽃의 형상과 무늬가 필요치 않고, 추상된 기호만으로도 멋진 정원이 상상되었던 것이다. 내게는 신비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기호들이 특별한 장소의 식물들과 함께 나타났을 때, 문득 정원사의 언어가 아담의 언어와 가장 가깝게 닮아 있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그에게 기호와 식물은 하나였다. 감각적으로 전혀 유사할 것 없는 그 둘이 하나인 것이다. 기호와 소리와 형상과 식물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정원사의 신비한 능력이, 사전을 대조해가며 굳이 이름을 기억해내려던 나의 억지스러움에 쓴웃음을 짓게 한다. 축약된 기호들과 숫자들에 적대적이었던 나는, 회계장부에 매료된 요안나처럼, 이 기호의 정원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Piet Oudolf, Serpentine Pavilion, London ⓒ www.fiveseasonsmovie.com/gallery/


기호들이 펼쳐내는 상상적 공간을 산책자의 느긋한 걸음으로 옮겨 다니다가 되돌아온 얀의 집에는 영혼과 함께 몇몇의 이름도 도착해 있었다. 산세베리아, 몬스테라, 칼라데아 그리고... 디기탈리스. 얀이 정원에 파묻은 시계에서 자라난 종 모양의 꽃은 아마도 디기탈리스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헤라의 잃어버린 주사위가 얀의 시간을 되찾아준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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