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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Nov 23. 2022

조경사의 결단

마가복음 11. 14

길을 가던 조경사는 시장했다. 

어제는 열두 일행과 함께 성내 곳곳을 둘러보느라 저녁 먹을 겨를도 없이 해가 지고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화려한 성의 면면과 대조적으로 베다니는 가난한 동네였지만, 그곳엔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있었다. 

그 때문에 성에서 3km나 떨어진 베나디를 이 마지막 여행의 거처로 삼았다. 

친구의 형편을 아는 그는 아침을 내어오기 전 일찍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조경사는 성 안 정원의 식물들을 대대적으로 손 볼 참이다. 한낮의 노동은 고되니 배를 채워둬야 한다. 

하지만 이미 빈 배로 40일 밤낮 황량한 사막을 걷고 측량해 본 그였다. 

한두 끼니 거르는 것은 크게 문제 될 것 없다. 그런 그의 눈에 유난히 푸른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성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어서 오라 손짓하듯, 이른 아침 건조한 동풍에 무성한 잎사귀들이 바스락댄다. 


전문가답게 호기심 어린 발걸음을 재촉하며 나무로 향하던 조경사의 미간에 주름이 지기 시작한다. 

아직 때가 일러 열매를 찾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일행은 그의 표정이 의아했다. 

'선생은 열매가 있을 거라 생각했나?' 

'글쎄. 전문가가 우리보다야 잘 알겠지. 나무에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말없이 눈짓만 보내던 일행은 조경사의 이어지는 한 마디에 잠시 두 귀를 의심했다.


"애야, 너는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구나. 이제는 이 자리에 둘 수가 없겠어."


잎은 푸르고 윤이 났다. 조금 있으면 푸른 잎 사이로 자줏빛 열매가 익어 암 수꽃들이 피어날 터였다. 

일행의 시선에는 그렇게만 보였다. 하지만 조경사는 무화과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성으로 드나드는 길목에 식재할 나무로 관상용으로는 부족했다. 자주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가 최적이었다. 

부요한 자에게는 잠시 무더위를 피할 그늘로 족하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허기를 달랠 열매가 필요했다. 

그래서 눈으로 보기에만 풍성할 뿐인 그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기로 조경사는 결심했다.  


열매 맺지 못할 무화과나무의 벌목은 일의 시작이었다. 곧 성 안 모든 식물이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조경사는 그 일을 위해 이 성을 방문했고, 오랜 시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정원을 정교하게 구상해왔다. 

풀 한 포기도, 꽃 한 송이도 그가 계획한 위치에 정확하게 놓일 것이다. 


"백합화를 보느냐? 솔로몬이 온갖 영화를 누렸으나 이 꽃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보지 못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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