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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Jul 16. 2023

달의 이동

일곱 교회 순례기 1

붉고 노랗게 펼쳐 놓은 석양빛으로 이스탄불 공항은 장관을 이루었다. 떠나온 내 나라 서쪽보다 더 먼 서쪽 이어서일까, 아직은 방향을 지시하는 낯선 문자 말고는 여느 대도시의 공항과 다를 바 없건만 저물어가는 태양의 뒤태가 설레도록 이국적이다. 아틀라스. 그리고 노을.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단어다.


일행의 짐을 찾고서 밤늦게 숙소에 도착하니 오랜 비행에 지친 세포에 기분 좋은 긴장감을 불어넣는 소식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이미 호텔엔 두 L 커플이 묵고 있고, 그들은 키프로스 순례 후 이스탄불로 이동했다고 메신저가 전한다. 한 명의 L은 내게는 <카이로스>의 노교수와 같은 생의 안내자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길을 배웠고, 그리스도는 그의 설교를 통해 더없이 힘든 시절 위로를 전하셨다. 4년 전 그에게서 이스라엘 선교여행을 제안받았을 때, 남편은 갑작스러운 심장질환으로 건강하지 못했고 난 10여 년의 연구를 정리하는 중요한 전시를 불과 석 달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나도 망설임 없이 L과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혼인서약을 하던 그 순간부터 그는 우리의 영적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갑바도기아의 기구들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달은 내 오랜 기대의 표상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선교사들을 위한 치료 일정만을 소화하기로 하고, 선행하는 이스라엘 순례길엔 걸음을 얹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곧 드러날 수치스러운 과거를 피해 달아난 베드로를 붙들고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구워 그 손에 쥐어주며 두 눈을 맞추고 사랑의 인사와 부탁을 전하시던 주의 음성을 갈릴리 물결에 귀 기울여 듣고 싶었다. 눈물 많은 주님이 가장 슬프게, 가장 아프게 우셨던 그 동산의 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사람의 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던 그 장소들, 거리들, 시간들을 내 몸으로 읽어보는 순간을 포기한 대신, 그곳에서 그리스도라는 성(family name)을 지니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가족을 만났다. 이름이 다를 뿐 그들은 모두 예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였다.


뒤늦게 벤구리온 공항에 내린 우리를 맞아 주던 유난히도 밝고 청명했던 샛별과 조각달은 아직은 보지 못한 그 가족의 얼굴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받아주며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이 지금도 내겐 가장 고귀하고 빛난 별로 새겨져 있다. 작지만 아름다웠던 이스라엘의 그 조각달이 이스탄불의 모든 별들을 삼킬 만큼 광대한 보름달이 되어 다시 찾아왔으니 어찌 설레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번 일정에는 오랜 시간 기다렸던 L과의 순례길이 예정되어 있다. 그는 주님과 같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먼 여행길에 읽어야 할 활자들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은 처음인 듯싶다. 두근대며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나는 이스탄불의 달빛아래서 <방랑자들>의 기억을 더듬으며 새롭게 만날 이야기 조각들을 꿰맬 도구들을 꼼꼼하게 챙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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