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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Jan 30. 2024

그림 이은숙

철학자는 아직도 꿈속을 헤맨다.

꿈에는 언제나 기호가 등장한다. 누군가의 이름인 것 같기도 하다.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또렷하지 않은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정성껏 읽어보려 하지만 완전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안에서 희뿌옇게 맴돈다. 익숙한 그 글자를 코 끝에 대어 본다. 아빠 냄새다. 아빠에게서는 언제나 흙냄새가 났다. 그날도 손톱 아랜 붉은 점토 입자가 깊숙이 들어차 있었다. 종일 흙과 씨름하며 아빠는 또 누군가의 얼굴을 빚었던 것이다. 어린 철학자는 호기심을 가득 안고 얼굴들의 진열장에 몰래 숨어든다. 그리고 새로이 만난 얼굴에 묻는다.


이름이 뭐야?

말을 못 해?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도 될까?

미정, 어때?

너도 아빠가 만들었으니 우린 이름이 같은 거야.


말은 못 하지만 잘 들어주는 친구가 생겨 기뻤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에나 이름을 지어주던 때였다. 언니, 오빠는 철학자가 부르는 이름이 엉터리라고 놀려댔다. 하지만 이름마다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다. 모든 이름엔 아빠와의 시간이 새겨져 있어서다. 한동안 친구의 대답을 기다리고 섰던 철학자는 어렴풋이 미소를 본 듯 "좋아! 내일 또 올게"하고 어둑해지는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빠가 남겨준 특별한 친구를 내버려 두고 급히 그곳을 떠나왔다. 그날 밤, 아빠는 떠났고 지금 꿈을 꾸는 철학자처럼 먼 꿈 속으로 떠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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