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은숙
철학자의 서고는 조금 특별하다.
단 여덟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아우슈비츠 수용소 31 구역의 도서관이나 책상 밑으로 기어 다니며 단어를 주워 모으던 어린 에즈미의 스크립토리엄만큼이나 작고 비밀스럽다. 그리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책들은 색깔이나 문양을 맞추고 있는 듯 기호의 순서나 글의 종류와는 아무 상관없이 배열되어 있다. 철학자는 매일 아침 첫 시간 서고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천천히 창을 열면 비쳐드는 햇살이 밤사이 내려앉은 먼지와 습기를 빨아들이고 오랜 시간 읽지 않아 탈색되어 버린 책등의 글자들을 선명하게 비춘다. 어떤 것은 잿빛 책등 위로 검은 점들만 흩어져 있다. 잉크가 떨어져 나간 자리다. 마치 오랜 귀중본만을 보관해 놓은 듯한 서고엔 몇 년째 철학자의 눈길만 닿을 뿐 책장의 활자들은 펼쳐지지도 읽히지도 않은 채 그저 잠들어 있다.
철학자는 글을 모른다.
나이가 들어 다시 찾은 대학 도서관은 그녀의 해방구였다. 매일 그곳에서 옛 서적들을 꺼내 읽었다. 아내와 엄마, 며느리라는 이름표 대신 잊고 산 이름 석자를 또렷하게 새겨 넣은 학생증을 내보이고 서가의 책을 두 팔 가득 안아 와 책상 위에 쌓아두었다. 활자에 굶주렸던 사람처럼 층층이 책을 뽑아가며 문장을 읽고 쓰고 그리고 되뇌었다. 그렇게 건져 올린 낱말들은 새롭게 철학자의 텍스트로 지어지고 있었다. 오롯이 자기만의 공간을 가져보는 것은 그녀의 오랜 꿈이었다. 그곳에 오직 낡은 책장의 소리들만을 초대하여 밤새 대화를 잇고 어느덧 근사한 낱말들의 집이 완성되어 가던 때, 느닷없이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공들여 짓고 있던 텍스트의 글자들도 함께 흩어져 버렸다.
겨우내 찾은 이름은 예전처럼 정교하지도 또렷하지도 않다.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어 동그라미를 그려보지만 여전히 시작점과 끝점이 맞질 않는다. 자꾸만 새어나가는 소리의 획들을 붙잡아보려 해도 혀끝도, 손끝도 철학자의 생각과 의지를 빗겨만 간다.
다시 옛 이름으로 돌아와 버렸다. 아내와 엄마라는, 그토록 달아나려 했던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