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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Nov 05. 2024

2024년의 퇴사 고민 1)

내가 답을 내리고, 그 답을 정답으로 만드는 수밖에.

올해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고민하던 문제가 있다. 바로 퇴사. 드디어 이 고민을 해결할 시점이 되었다. 몇 주 전 대표에게 퇴사를 하겠노라 말했다. 조직 생활도 마케팅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고, 무엇이 되었든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두 번째 스무 살인 마흔이 되는 내년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무작정 퇴사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직 한창(?) 돈을 벌 때라는 생각, 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른 브랜드를 맡아 일하고 싶었던 지라 이직할 곳을 마련해 두고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다른 회사에 지원하는 족족 서류에서 탈락했다. 면접을 본 건 겨우 한 번. 합격해도 안 갈 회사였는데, 먼저 차였다. 회사에서 변화도 많았다. 뼈를 묻을 거라 생각했던 팀장과 본부장이 연이어 퇴사했다. 그러면서 나의 직급은 빠르게 올랐다. 내가 속한 조직을 안정시키고 싶은 마음에 삼 개월씩 퇴사를 미루다 시월 말이 되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이직에 대한 마음도 옅어졌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만 커져 퇴사를 뱉었다. 회사의 방향성은 동의하지만, 일의 호흡이 갈수록 버거웠다. 가끔 높아지는 대표의 언성에 나는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었다. 열 달을 품고 있었던지라 퇴사를 말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개뿔. 기분이 이상하리만치 착잡했다. 헤어지자고 한 건 난데, 괜히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연인 같았다. 퇴사를 말한 날, 이별한 사람처럼 혼자 소주를 들이켰다.


퇴사를 말했을 때 대표는 당황하며 다시 생각하라고 했지만, 다음 날이 되니 생각보다 쿨하게 나를 대했다. 질질 끌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의 빠른 포기가 서운했다. 그리고 퇴사 후 나의 삶이 당장의 현실처럼 느껴졌다. 퇴사 후 일상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내 월급이 귀엽고 초라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안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크고 대단한 돈이라는 생각도 하고.


얼마 전, 지난 직장에서 함께 일한 이사님을 만났다. 이사님은 디자이너여서 나의 직속 상사도 아니고 유관 조직의 임원이었는데, 나를 참 예뻐했다. 자기를 갈아서라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한다. 그런 적이 있었나, 내가. 생각 안 난다. 하지만 이사님은 일 얘기만 하면 눈이 반짝 거리는 구나, 예전에도 그랬지-하고 바로 생각났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나도 그런 눈빛으로 일하고 싶어 지더라. 곧 퇴사를 한다며 일도 힘들고 성장도 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 문제를 대표와 상의를 하거나 개선 방법을 찾아보았냐고 내게 물었다. 우리 대표가 나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인가, 아리송하면서도 아차 싶더라. 상의가 되지 않더라도 말은 해볼 수 있었는데. 내가 개선 방법을, 대안을 찾지 않으니까 지시에만 따르게 되고 쪼그라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난 금요일, 대표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일 이야기를 하다가, 퇴사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웃으며 넘어가려고 했는데 대표는 사뭇 진지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제안을 했다. 한두 달 휴가를 주겠다는 것, 그리고 연협에서 제대로 보상을 하겠다고. 더불어 조직을 제대로 세팅해 주겠노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거절하려고 하는데, 대표가 대답하지 말라며 일주일만 고민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의 제안보다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이 회사에서 나의 쓸모를 늘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퇴사를 말하고 나서야 인정을 받는 이 아이러니.


요 며칠 대표의 제안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다. 쉬고 오면 이 회사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을까. 월급이 좀 더 오르면 대표의 언성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직이 세팅되는 과정 속의 진통을 나는, 팀원들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이곳에서 다시 성장할 수 있을까. 지시에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방안을 찾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눈을 반짝거리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갈아서라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답이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내가 답을 내리고, 그 답을 정답으로 만드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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