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그냥 올해처럼 살까봐.
언젠가 욘두가 연말이면 새해의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는 말을 듣고 몇 년 전부터 나도 따라 하기 시작했지. 아직 21년이 보름 넘게 남아있지만 22년에 나에게 편지를 미리 써보기로 했어. 왜냐하면 여기는 제주도고, 이곳에 나 혼자 있으니까. 나에게 편지를 쓰기에 완벽한 시공간을 갖추었다고나 할까, 안 쓸 수가 없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폈는데, 담배를 피면서 생각해봤어. 올해 가장 잘한 일을. 처음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한 가지가 떠오르자 계속 다른 것들이 생각났어. 먼저 앞머리를 기른 걸 참 잘한 것 같아. 사실 기른 앞머리가 나에게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오래전부터 앞머리를 길러보고 싶었거든. 하지만 거지존에 입성할 때마다 포기하고 다시 앞머리를 자르고, 기르다가 거지존 되면 또 자르고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길러 본 거야. 이제는 앞머리가 턱 가까이 내려와 귀 뒤로도 쉽게 넘어갈 정도로 길렀는데 뭔가 뿌듯한 거 있지.
그리고 아까 박수기정 앞 바다를 보며 생각한 건데, 결혼도 참 잘한 것 같아. 바위에 앉아서 아 너무 행복하다고 중얼거렸는데, 왜 행복한가 하니 혼자 제주도에 와서 차를 끌고 돌아다니며 바다를 보고 있는게 너무 좋아서 행복한 거야. 특히 그중에서도 ‘혼자’라는 게 행복을 크게 느끼게 하는 요소였는데, 늘 남편과 같이 있다가 혼자 있으니까 이게 더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졌어. 그러면서 생각했지. 만약 결혼을 안 해서 늘 혼자 지내다가 제주에 왔으면 이 행복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서울에서 혼자 있다가 지역만 바꿔서 혼자 있는 거니까 감흥이 적었을 거라는 거지. 그래서 결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혼자 있는 시간의 소중함과 행복을 배로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리고 부산 친구들과 여행을 간 것도 참 잘한 일이야. 늘 부산 아니면 서울에서 만나다가 다른 지역에서 함께 여행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어.
또, 얼마 전까지 회사에 7시 출근을 했던 것도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언젠가부터 새벽 기상에 자신이 없었는데, 한 달 넘게 새벽 기상을 잘 이어 갔거든. 다시 새벽 기상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을 보았다고나 할까.
분명 올해에 아쉬운 일도 있어. 이 텍스트를 쓰자마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어. 친구들과 하려고 했던 여러 프로젝트들이 있는데 상황이 안되어서, 그리고 내가 게을러서 유아 무야 된 것들. 하지만 뭐 시도를 아예 안 한 것도 아니고,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유의미하니까 이것도 그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할래. 헿.
새해엔 그냥 올해처럼 살까 봐. 드디어 앞머리를 길렀던 것처럼 오랜동안 하고 싶었던 작은 일을 하면서.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어떤 일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가능성을 엿보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래도 구체적으로 좀 나열해 보자면 한 달에 한 곡씩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외우고 싶어. 아까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데 ‘City of Stars’가 나와서 열창을 하는데 너무 좋은 거야. 이 노래를 외워두길 정말 잘했네, 이러면서 세 번인가 반복해서 불렀어. 그래서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열심히 외우고 싶어. 또 재봉틀을 배우거나 콘텐츠 만드는 일들, 그리고 제주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고 시도하고 싶어.
좋다. 한 때는 새해하면, 나이 한 살 더 먹는구나 이런 생각뿐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기도 하고, 새해를 기대하기도 하다니 나 많이 컸네. 그리고 잘 컸네. 새해에도 잘 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