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두려워하던 것은 다 허상이었다는 걸,
4일 정도가 지나니 실감이 난다. 낯선 곳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오랜동안 꿈꿔온 한 달간의 휴가를 앞두고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언젠가부터 막연하게 노란 머리 외국인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휴가가 주어지니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서더라. 살면서 이렇게 긴 휴가도 처음이고, 아시아를 벗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막연했다.
다행히 해외 경험이 많은 남편이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주었고, 주위 사람들도 많이 격려해 주었다. 처음엔 한 달이라는 시간을 빼곡히 채워 이 나라 저 나라에 가볼까, 생각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긴 시간 동안의 해외여행이 부담스러워 차 끌고 국내나 한 바퀴 돌아볼까 고민도 했고. 그러다 정한 곳이 바로 이곳, 이탈리아다.
왜 이탈리아냐고 묻는다면 별 다른 이유는 없다. 먼저 내가 알고 있는 나라가 몇 되지 않았다. 또 한국에서 가끔 어떤 아이템이 마음에 들어 이거 뭐지 예쁘다 싶은 것들은 다 이탈리아의 것들이어서 왠지 이탈리아랑 나랑 잘 맞을 것 같아,라는 근거 없는 친근감이 있었고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하기도 해서…이런 시덥잖은 이유로 선택했다.
이탈리아 여행으로 정하고 나니 두려움이 더 커졌다. 여행 일정을 어떻게 짜야할지 어디에 묵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것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러 콘텐츠나 조언에 남들과 똑같이 짜여진 대로 하는 여행은 조금 싫은 걸, 하는 반발심도 있었다. 유적지가 많은 곳이니 만큼 얕더라도 공부를 좀 해서 둘러보고 싶다 혹은 여행을 하면서도 내 루틴을 잘 유지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다. 소매치기도 무섭고, 바가지 쓸까 봐 무섭고, 누가 시비 걸까봐 무서웠다. 여행 떠나기 전, 시아버님이 말씀하시더라. 그런 거 생각하면 여행 못 한다고 그냥 즐기라고.
장시간 비행에도 두려움이 있었다. 기껏해야 여섯 시간 남짓 비행을 해본 게 고작인데 열 시간을 훌쩍 넘게 비행기에 있어야 한다니. 아프면 어쩌지부터 담배 피우고 싶으면 어떡하나 별별 걱정을 다했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기 전, 심각하게 아팠다. 어지럼증 때문엔 잘 걷지를 못했다. 가만히 있는 건 괜찮은데, 움직이면 어지럽고 호흡이 힘들었다. 남편은 이런 상태면 여행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웬만하면 병원을 가지 않는 내가 세 군데의 병원을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진짜 신기한 게 여행 떠나기 이틀 전부터, 그러니까 회사를 안 나가기 시작한 시점부터 조금씩 낫더라. 역시 회사가 만병의 근원인가. 이탈리아에 도착하고 나서도 처음엔 조금 아팠다. 간간히 어지럼증이 찾아와서 힘들었는데 무시하고 걷다 보니 또 괜찮아졌다.
막상 떠나오니 아픈 것도 이제는 다 나은 것 같고, 물론 조심해야 하긴 하지만 소매치기 등 낯선 이로부터의 위험이 크지도 않았다. 헤매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구글맵이 잘 되어 있어서 잘 헤매지도 않고 헤매면 헤매는 대로 또 즐기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던 것은 다 허상이었다는 걸,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두려움을 깨고 나니 얻는 것이 실로 많았다. 좀 더 자유로워졌고, 그러면서 무뎌져 있던 감각들이 살아나고 있다. 멍 때리는 여유도 생겼고, 사람이나 경관을 바라볼 줄 아는 관심도 생겼다. 또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하게 된다. 평소에 인지하지 못했던 내가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식도 들여다 보고 반성을 하게 되더라. 이러려고 여행을 하는 걸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