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나니, 그리고 술에서 깨어나니 도착했다.
인천에서 로마까지는 비행기로 열세 시간 남짓 걸렸다. 그나마 직항이어서 제일 짧은 시간으로 갈 수 있는 거였다. 장시간 비행은 처음이라 어떨지 상상이 잘 안 되었지만 무지하게 지루할 것 같은 느낌은 확실했다. 지루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먼저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다운 받았다. <더 글로리>를 다운 받았는데, 잔인한 장면이 많아 옆 자리 승객에게 실례일 수도 있다는 친구 조언에 다른 영화도 몇 편 다운 받았다. 또 밀리의 서재 앱을 다운 받았다. 배낭 하나 들고 가는 내게 종이책은 좀 버거워서 도서 앱을 선택했다. 펜과 노트도 준비해두긴 했지만 끄적이고 싶을 땐 노션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 세가지만으로 지루한 비행을 견딜 수 있을까, 내심 조금 걱정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도 즐거운 비행이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때문이 아니라 바로 술 때문에! 승무원이 식사를 주며 음료를 묻길래 맥주를 달라고 한 게 시작이었다. 한 잔을 마시니 긴장이 풀렸고, 두 잔을 마시니 행복해졌다. 다행히도 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아서 술을 마시며 <더 글로리>를 봤다.
시간이 지나 술이 좀 깨버려서 이번엔 와인을 주문했다. 그리고 이 말도 덧붙였다. 많이 주세요. 많~~~ 이, 가득! 스낵과 함께 와인을 먹는데 이건 또 왜 이리 맛있는 거야, 꿀떡꿀떡 넘어가더라. 시간이 또 흘러 맥주를 다시 주문했더니, 출출하면 라면을 주겠단다. 이 서비스 뭐야. 사육당하는 느낌이 얼핏 들긴 하지만 이런 사육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라면을 한 사발 때리고 기분이 좋아져 노션에 음주 비행을 예찬하는 글을 썼다.
음주 비행이라니! 이렇게 근사하고, 효율적이고, 멋질 수가. 생각해 보면 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마시면 신고당하거나 영상이 찍혀 sns 스타가 될걸. 또 택시는 술을 마시고 나서 타는 수단이지 술을 마시면서 이용하는 교통편은 아니잖아. 내가 차를 끌면서 음주를 하는 건 있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고. 그러니까 비행기는 음주를 하면서 이동할 수 있는, 그것도 다른 나라로 멀리 이동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 아닌가. 비행기 삯에 다 포함되어 있기야 하지만 왠지 공짜 술에 안주까지 챙겨 먹는, 개이득 같은 기분도 드니 얼마나 좋아. 게다가 술을 마시고 있어도 비행기는 계속 날아서 로마로 나를 데려다 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냐고, 뭐 이런 글을 노션에 써놨더라. 아무래도 좀 취해서 많이 신났던 것 같다.
얼마 간은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니, 그리고 술에서 깨어나니 도착했다. 설레면서 두려워하던 그곳, 로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