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로 답은 달라졌다.
여행지에 딱 세 가지만 챙겨갈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챙기겠는가.
예전부터 나의 답은 꽤 명쾌했다.
안경닦이, 안경, 시계. 이 세 가지면 충분했다.
오늘부로 답은 달라졌다.
안경, 핸드폰, 유심.
이번 여행을 위해 유심 두 개를 챙겼다. 아니, 챙겼다가 아니라 남편이 챙겨주었다. 평소 데이터를 많이 쓰지 않지만 여행지에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넉넉하게. 그리고 시칠리아 숙소는 내가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무는 숙소이다. 숙소에 온 첫날, 호스트에게 와이파이를 어떻게 사용하냐고 물었더니 어색한 번역으로 답이 돌아왔다.
- 와이파이가 폭풍우에 침몰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와이파이가 아니라 내가 침몰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밀리의 서재로 느긋하게 책을 읽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나갈 준비를 했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데 데이터가 다 소진되었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유심을 갈아 끼웠다. 그러곤 친구와 카톡을 하며 식당에 갔다. 친구가 이제는 걸어 다니면서도 카톡을 잘하느냐고 물었고, 여기는 이제 내 나와바리라고 대답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또 카톡을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다. 메시지가 안 간다. 뭐지. 여기가 좀 외진 곳이란 그런가. 밥 먹고 이따 식당을 나가면 또 잘 되겠지, 생각했다. 어느새 핸드폰은 뒷전이었고 와인을 한 잔 더 시켜 말아, 중대한 사안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인터넷이 안 터진다. 진짜 이상하다. 집에 왔는데도 안 된다. 뭐가 문제지. 조금 이따 하면 진짜 되겠지, 마저 책을 읽었다. 시간이 더 지난 뒤 핸드폰을 확인했는데도 안된다. 망했다. 어떡하지.
유심을 잘못 끼웠나 싶어서 다시 뺐다가 끼우는 작업을 몇 번 반복했다. 매뉴얼에서 내가 놓친 게 있나 싶어 꼼꼼히 읽고 다시 그대로 해보기를 또 몇 번. 안 될 일인가 보다. 어쩌지.
체크아웃까지 3일 남았다. 인터넷 없이 살아봐? 자신 없다. 그럼 지금 방을 빼고 와이파이가 되는 숙소를 알아봐? 좋다. 근데 뭘로 알아보지? 인터넷이 안되는데. 여기도 우리나라처럼 편의점에서 유심을 살 수가 있나? 아차차, 여기는 편의점이 없지. 그럼 마트로 가야 하는 걸까. 여기는 시골이라 유심도 안 팔 것 같아. 그럼 체크아웃까지 아날로그로 살아볼까. 사실상 여기 지리는 다 아니까 돌아다니고 먹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걸. 게다가 밀리의 서재에 다운로드하여 둔 책도 있고, 넷플릭스에 영화도 몇 편 있으니까. 그거까지는 오케이. 근데 아무랑도 연락을 할 수가 없잖아. 딸내미 혼자 여행 갔다고 엄마는 매일 같이 잘 지내냐고 연락이 오고, 몇 시간 연락이 안 되면 걱정하거나 궁금해하는 남편과 친구들이 있는 걸.
오만 별 생각을 하면서 두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아 몰랑~ 이렇게 지내보자 싶다가도 인터넷 하나 안 되는 게 너무 무섭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다 일단 나가자. 해가 떠 있을 때 나가서 방법을 찾자. 와이파이가 되는 커피숍에 가든 마트라도 가보든 하자 싶어 움직였다.
여행하면서 이렇게 가게를 꼼꼼히 살핀 적이 있던가. 골목을 다니며 가게를 찾았다. 그러다 발견했다. 삼성! 아이폰! 수리점!!!!!! 무작정 들어갔다. 난 이탈리아어가 안되고, 상대방은 이탈리어만 되는 골치 아픈 상황이 펼쳐졌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곳은 마치 여의도 사무실의 내 자리 같은 곳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마을 회관처럼 들락날락했다. 동네 주민들이 죽치고 있었는데 그들이 영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셋업을 마치고 다시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꺄.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뭐라 뭐라 하더니 차오 차오! 하며 인사해 주었다.
평소 나는 핸드폰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나를 착각했다. 네비와 알람만 아니면 핸드폰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일할 때야 핸드폰을 곁에 두고 있지만 퇴근하면 핸드폰은 쳐다도 보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내가 꽤 핸드폰에 의존도가 높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이국을 여행하고 있다는 특수성이 있기야 하지만.
사실상 내가 아니라 핸드폰이 여행하고 있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으로 숙소부터 항공이나 버스 등 교통편까지 예약을 하고, 구글맵으로 식당을 검색하고 길을 찾아가고. 핸드폰으로 글을 쓰고 올리고, 사진을 찍고 보내고. 메신저로 소식을 전하고 수다를 떨고. 모든 것이 핸드폰, 정확히는 데이터가 다 하고 있었다.
가끔 핸드폰 가격을 보면서 뭐 이 쪼끄만 게 노트북 값이냐, 어이없어했는데 그럴 일이 아니다. 내 평소 생활부터 여행까지 책임져 주는데 노트북 가격인 게 감사할 일 아닌가 싶다. 언젠가 핸드폰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여행지에 세 가지만 챙겨 갈 수 있다면 핸드폰과 유심을 제일 먼저 챙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