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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Mar 29. 2023

아주 보통의 행복_최인철

봄날의 벚꽃은 언제 꼭 피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런 용건 없이도 그냥 연락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당신은 외롭지 않다.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의 선물이 우리 자신을 영웅으로 만든다면, 그들의 선물은 받는 사람을 영웅으로 만든다.


행복은 ‘내 삶을 사랑하는 정도’다. 딱 그 정도로만 이해하면 된다.


야구를 좋아해야만 야구장에 간다고 생각하지만 야구장에 가면 야구를 좋아하게 된다.


야구장은 역설적이지만 명상의 장이기도 하다. 야구장에서는 종종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온전히 공 하나에 집중한다. 경기에 집중할수록 함성은 커지지만 의식은 또렷해지고 마음은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나 선택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습관적 고육지책으로 ‘아무거나’를 남발하고 있다면, 음식뿐 아니라 삶의 많은 영역에서 이 같은 도피성 선택을 반복하고 있다면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음식도 아무거나, 영화도 아무거나, 여행도 아무 데나, 심지어 직업도 아무거나… 모든 것이 아무거나라면 답은 둘 중 하나다. 내공이 아주 깊은 사람이거나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우리 모두가 달려가야 할 곳이 야구장이다. 꼭 야구장뿐이겠는가. 축구장도, 노구장도, 콘서트장도, 극장도 우리 뇌에는 모두 야구장이다. 열광하는 것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행복이다.

당신의 야구장은 어디인가?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진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살면 좋아하는 것들이 명확해진다. 우리가 서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자식의 학벌이나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의 잔고다.


행복 천재들은 좋아하는 것에 관한 한 천재다. 행복 천재들은 좋아하는 것이 많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고 많으면 마음속에 ‘관심’이 가득하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고 마음속에 가득하면 ‘근심’이 가득하다. 싫어하는 사람들, 싫어하는 일들, 싫어하는 장소들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들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아도 불편해하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 어둠 속에서 자발적 격리를 실천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소유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경험을 구매하는 존재들이고,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돈으로 시간을 사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자유를 향하고 있다.


습관은 몸이 아니라 공간에 밴다. 습관에 대해 버려야 할 가장 큰 오해는 습관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맥락에 구애받지 않는 행동이라는 착각이다. 습관은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반복하는 행위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반복되는 행위가 아니다. 묘하게 거기만 가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행위가 습관의 본질이다.


타인의 실패를 통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을 통해 경험하는 쾌감)’를 경험하지만 그 쾌감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간섭하기가 행복에 불리한 이유는 간섭이 살의 중심을 ‘자기’에게서 ‘타인’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한 무관심은 마음의 힘을 비축하는 행위다. 유일한 대화 주제가 가십과 스캔들뿐인 사람을 멀리하는 것도 마음의 힘을 축적하기 위한 행위다.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알 가치가 없는 내용들을 폭로하는 사람들과는 담을 쌓아야 한다.


행복 천재들은 마음을 다잡기 위한 결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로 간다. 그들의 행복 습관이 공간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특정한 행동을 유도하는 자동항법장치 같은 존재다.


모두가 실시간성에 집착할 때, 한 박자 늦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해야 한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켜는 행위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끈임없이 접속하느라 분주한 것 같지만 실은 게으른 것이요, 적극적으로 세상을 탐색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단 한 발짝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나태다. 바쁨을 위한 바쁨일 뿐이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관심이다. 행복 천재들의 또 하나의 비밀 병기다.


마음은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대상이다. 자연만큼이나 지켜내야 할 대상이다.


생계를 위한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 때문에 무뎌질 대로 무뎌진 감각을 망치로 부수듯 깨어나게 하는 작업이 여행이다.


시간엔 리듬이 없고, 맺고 끊는 맛이 없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선물을 들고 온다. 일상의 시작과 끝이 자연적 시간의 흐름에 의해 규정된다면, 인생의 시작과 끝은 의미 있는 경험에 의해 규정된다.


행복의 본질이 자유인만큼 그 실천도 자유여야 한다.


행복의 두 번째 보험은 ‘자율성’이다. 무엇이 되었든 외부로부터 강요당하지 않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 단순히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보다는 업무 시간 중이라도 필요할 때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느냐가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근로시간 단축도 중요하지만 탄력 근무제가 더 중요한 이유다.


두 발로 시내를 걸어보는 것, 하루 세끼를 여행을 온 것처럼 계획하고 즐겨보는 것, 하루 정도는 낮부터 와인에 취한 채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크게 틀어놓고 감상하는 것.


우리의 삶이 만족스럽기는 해도 그리 흡족하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기준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시간 관리에 대해 김연수 작가가 소설 쓰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면, 의미형 인간의 시간 관리는 중요한 일 외에는 다른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리라.


칼융이 처음 제안한 내향성-외향성 개념에 따르면 내향성이란 자기의 내면 세계만으로도 충붕한 자극을 받는 성향이다.


마음이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분리수거하러 가는 길도 걷기 싫어하는 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열광한다.


나이가 들수록 성과가 줄어드는 이유는 나이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노력을 훨씬 덜하기 때문이다.


나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도 성장한다. 나이와 함께, 직급과 함께 그들도 성장한다. 그들을 지금의 나이와 직위에 맞게 대접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입에서 ‘저 사람 변했어. 이상해.’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이상해 보이는 두 번째 이유는, 상대를 옛날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이 이미 졸업하고 어엿한 가장이 되었음에도 교수는 여전히 그를 학생 때 모습으로 평가한다. 예전에는 부하직원이었지만 지금은 한 조직의 책임자가 된 사람을 여전히 부하의 모습으로 평가한다.


착한 행동을 하다 보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무시한 채, 착한 사람이 먼저 되어야만 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완벽주의의 잣대를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착한 행동을 못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이기심이 가득한데 어떻게 타인을 도울 수 있느냐며 손사래를 친다.


우리는 종종 완벽주의적인 기준을 들이대 스스로의 행동을 억압해버린다.


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져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져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연습 방법은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영역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초보인 영역에 직접 들어가 고수나 스승들을 만나봐야 한다. 내 삶에서 내가 중심이 되지 않는 영역 하나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게다가 어떤 경우든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려 본때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임에도 반드시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야 말며, 자신의 역린을 건드린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내친다. 하지말아야 할 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넘는다.


어제 하루,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어떻게 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가 있었습니까?


시그니처 특성은 시그니처 질문으로 나타난다. 그 사람 하면 떠오르는 그 사람만의 질문이 있다.


주도하지 말고 끌려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누군가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어디서든 당당하거나 뻔뻔하다. 도덕성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기초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질문을 가져야 한다.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시그니처 질문을 만들어내야 한다. 개인이건 사회건, 그것의 품격은 그가 던지는 질문의 품격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대한 질문이 실종된 사회다.


삶의 모든 문제를 사람의 문제로만 국한시키지 않을 때, 삶은 여유로워지고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인생의 많은 부분이 순전히 타이밍때문일 수도 있다고 인식하게 되면 오만이 설 자리가 사라진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대와 나는 운명이 아니라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낭만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좋은 삶과 좋은 글은 육하원칙을 따른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는 좋은 글이 갖춰야 할 조건이자 좋은 삶에 대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상이 선명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동안 너무 방만하지는 않았는지, 감각적 재미에만 중독된 나머지 홀로 있을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관행과 위계를 지키기 위해 회의를 남발하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하고, 가족과 나누는 소박한 밥상에 만족하고, 과시적 모임을 경계하고, 실력과 체력을 기르는 실속 있는 일상을 소망한다.


하루의 시작을 기분 좋게 열고 싶으면 하루의 끝을 기분 좋게 마쳐야 한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사소함 속으로 더 깊이,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다.


’나’로 떠났다가 ‘우리’가 되어 돌아오는 길


행복은 고통의 유무가 아니라 고통에 임하는 자세에 의해 결정된다.


마음이 가난해야 모든 것이 선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하고 텅 비어야만 세상 모든 것이 선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선물처럼 느껴질 때 행복은 정점에 도달한다.


'절대’에 속박되기보다 ‘예외’를 허용하는 여유, 행복을 누리는 또 하나의 팁이다.


”나는 치킨 채식주의자야.”

유학 시절 레바논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채식주의자이지만 치킨은 먹기 때문에 치킨 채식주의자라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규칙에 자신을 너무 구속하기보다는 하나쯤 예외를 만들어놓는 여유가 좋다. 스스로 숨 쉴 공간을 만들 줄 아는 지혜, 그 작은 틈새에서 행복이 싹튼다.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나이가 들면 행복으로 크게 보상받는다. 당신이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면 노후의 행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누군가에게 불친절하다면 당신은 큰일 났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고통에 대한 우리의 예측은 대개 과장되어 있다.


’무조건 금연’보다는 ‘집에서만 금연’부터 해보는 것이 심리적으로 덜 괴롭다.


먼저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주어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자원봉사를 하거나 친척을 만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주는 사람은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늘 바쁘다고 느끼는 까닭은 우리의 시간이 온통 자신의 일들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을 오히려 누군가에게 내본 사람이라면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시간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봄날의 벚꽃은 언제 꼭 피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작년보다 보름 늦게, 혹은 열흘 일찍 피기도 한다. 그래도 된다.

별 탈 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은 스스로를 자유자재형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생각의 순발력을 자랑하는 사람보다 오랜 화두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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