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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Apr 11. 2023

내 일로 건너가는 법_김민철

회사가 없을 때의 '나'를 키우는 일도 못지 않은 과제였다.

그러니까 지금 하는 일을 통해 무럭무럭 나를 키우는 것과 동시에 나 자신을 키우는 일도 병행하는 것이다.


오히려 내겐 그 성실성에 앞선 다짐이 있다. 오래된 다짐이다. 바로, 나를 키우는 것을 나의 본업으로 삼자는 다짐.


일이 중요하지만 나도 중요했다. 일에서의 성공만큼이나 내 일상 속에서의 행복이 중요했다. 나에겐 ‘회사에서의 나’를 키우는 일도 중요했지만, 회사가 없을 때의 ‘나’를 키우는 일도 못지 않은 과제였다.


다시 원점에 섰다. 이 일이 내 인생의 훌륭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하는 동안에는 덜 괴롭고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그 바람도 변함이 없었다. 지쳐서, 타의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마치 돈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매 순간 살았지만, 사실 돈이 중요했다. 한 달을 다니면 한 달 치 월급을 받았고 그건 한 달 치 밥과 술과 집과 버스와 영화와 데이트와 취미와 수다와 즐거움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돈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누구 앞에서건 돈 이야기를 하는 건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돈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그 모든 세계가 좋았다. 친구가 시험에 붙었을 때 회전초밥집에 데리고 갈 수 있어서 좋았고, 서점에서 책 두세 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어서 좋았다. 남자친구에게 밥도 사고 커피도 사고 술도 살 수 있어서 좋았고, 하루에 몰아서 영화를 네 편이나 봤는데도 잔고 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겨우 그거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겨우 그게 나에겐 대단한 사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사치는 어차피 내 꿈속에 없었다. 다음 달이면 다음 달 월급이 들어오고, 그건 다음 달 치 꿈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놀랍도록 안전한 꿈이었다.


직업은 나의 현실적인 기반이자 매일의 환경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반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이 환경을 나에게 더 쾌적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매 순간 촘촘히 날을 세우며 일하겠다는 다짐이자 태도다. 매 순간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겠다는 태도, 그리하여 사생활의 영역에 회사 일을 침범 시키지 않겠다는 태도. 내 생활의 주도권을 내가 갖겠다는 선언. 야근을 하긴 하는데, 도대체 왜 야근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시간은 신입사원일 때 끝내야 한다. 내 일인데 언제 끝날지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내 일의 주도권을 내가 가지지 않는다면 누가 가진단 말인가.


우리가 여섯 시 퇴근을 회사 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삶이 너무 내 것이어서. 내가 이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어서. 일이 너무 뻔뻔하게 이 삶의 주인인 양 엉덩이를 들이미는 상황을 너무 많이 겪어서. 그렇게 슬금슬금 사적인 자아는 무너져버리고, 그곳에 일하는 자아만 떡하니 서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너무나도 다각도로, 너무나도 많은 사례들을 통해 봐오지 않았던가.


큰 일을 인수분해하고, 역산해서 스케줄을 촘촘하게 짜는 것에 공을 많이 들이는 까닭은, 다시 말하지만 일의 힘을 빼기 위해서다. 일이 높은 파도를 일으켜 우리 일상을 집어삼키는 꼴을 막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꼭 내가 팀장이라서만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일상의 정원을 잘 가꾸고 싶은 사람이다. 퇴근 후에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TV 앞에 멍하지 앉아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더라도 내 마음대로 써버릴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꼭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앞서가는 여자 선배가 없을까. 기꺼이 따르고 싶은 여자 선배가 이토록 간절할까. 늘 해결되지 않은 답답함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깨달았다. 뛰어난 함 사람이 닦아놓은 좁은 길이 없는 대신, 평범한 우리가 함께 닦고 있는 넓은 길이 있었다. 먼 곳을 두리번거리며 선구자를 찾을 일이 아니었다. 시선을 바로 옆으로 돌리면, 바로 뒤로 돌리면 함께 가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바로 옆에, 바로 뒤에,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토록 많다면 우리가 서로의 파도가 될 것이다. 그 파도를 타고 더 많은 여자들이 더 넓은 곳으로 신나게 달려갈 것이다.


팀원의 실수를 다른 팀원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마시킨다. 심지어 그 실수 덕분에 이런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며 공을 떠넘기기도 한다. 한 팀원이 화가 아주 많이 났을 때, 다른 팀원이 의외의 태도를 보여주며 그 화를 가라앉히기도 한다. 큰 잘못을 한 것 같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팀장이 나타나 평소보다 더 차분한 모습으로 그 일을 수습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모두가 알게 된다. 이 팀은 안전하구나. 이 팀 안에서 나는 안전하구나. 이 팀을 믿고 기어코 나도 내 몫을 다해야겠구나. 안전하다는 감각은 한 명의 특출난 능력이 만들어내느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순간순간 보여주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었다. 얼마나 오래 아껴온 퇴사카드인데, 그걸 나를 존중하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쓸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인저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너무 큰 권한을 주는 거였다. 이 카드는 온전히 내가 필요할 때, 여기까지면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 때, 내가 다른 삶을 결단내릴 때, 내가 쓰고 싶은 카드였다. 나와 우리, 우리 아이디어들에게 무례한 당신들에게 내 삶에 대한 권한까지 넘겨버릴 수는 없었다. 그 권한은 오롯이 나의 것. 내가 생각해서, 내가 판단해서, 내가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가장 원하는 시기에, 내 결단으로 퇴사는 이루어져야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십수 년을 해온 내 일에 대한, 내가 다닌 회사에 대한, 그러니까 나에 대한 예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아이디어는 회의실 책상 위에 펼쳐진다. 방금 전까지 나의 아이디어였던 것이 모두의 아이디어가 된다. 회의실 안의 아이디어는 공공재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아이디어는 원작자의 품을 이미 떠났다. 여기서부터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진짜 우리의 아이디어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항상 ’나‘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보다 ’우리‘의 머리가 더해진 아이디어가 힘이 세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일의 신뢰를 얻는 사람이, 사람들로부터도 신뢰를 얻는다. 물론 그게 회사 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잘 안다. 정치도 있고, 인간관계도 있고, 치사한 공작도 있고, 끈끈한 형제애도 있고. 하지만 그건 내가 지닌 패가 아니다. 그럴수록 나는 더 내 손의 일을 꽉 쥔다. 여긴 회사니까. 우리는 이곳에 일을 하기 위해 모였으니까.


나는 이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팀원도 스스로를 포기하는 마당에,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멀리 점을 찍어주는 팀장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무능한 팀원이라는 판단을 보류하고, 유능한 팀원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여기까지 와보라고 독려할 수 있는 팀장의 능력이란 어떤 것일까.


뭐라도 되었겠지. 뭐라도 되고 있겠지. 어쨌거나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 먼 곳에 점을 찍어줄 차례다. 내가 되고 싶은 팀장이라는 점을 저 멀리 툭 찍어두고 매 순간 그쪽으로 조금이라도 가보려고 노력 중이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적이진 않은 팀장이 되기 위해. 사회성이 제로에 수렴하지만 최선을 다해 팀 사람들과는 어울리는 팀장이 되기 위해. 동시에 맡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고 무엇보다 합리적인 팀장이 되기 위해.


좋은 피드백이란 무엇일까?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피드백, 피드백을 받는 사람의 노하우와 생각을 빌리는 피드백, 피드백을 받는 사람을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참여시키는 피드백이 좋은 피드백이다.


피드백을 줄 때 한마디 말만 전달하지 않으려는 이유다. 최대한 내가 가진 정보 전부를 준다. 광고주의 성향부터 예상되는 반응과 이 제작물이 가진 특수성과 놓치지 않아야 할 핵심까지 전부를 준다. 내가 지금 왜 이런 판단을 하는지, 왜 특정 부분을 강조해달라고 말하는지 최대한 이해가 되도록 말한다.


“폰트 좀 키워주세요”라는 단순한 피드백이 필요할 때는 있지만, 폰트를 키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저 문장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방법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설명을 해야 한다. 전문가들이 고민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핸줘야 한다. 그렇게 디자이너의 손부터 머리까지 모두 빌려와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빌려와야 한다. 혼자만의 일방적인 피드백을 즐겨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당신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결과물보다 여러 명의 머리와 마음이 고민해서 만든 결과물이 대체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훌륭한 법이다.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옳게 만든다.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옳게 만든다‘에 담긴 무게를, 결단을, 각오를, 책임을. 여기서 이 문장의 의미를 조금 더 명확하게 해두고 싶다.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는 ’(내가) 결정을 하고, (나와 우리가) 그 결정을 옳게 만든다‘가 될 것이다. 결정은 팀장의 몫이다. 하지만 정확한 시점에 꼭 필요한 결정(옳은 결정이 아니더라도)을 팀장이 해준다면 팀원들은 당신을 믿고 그 결정을 옳게 만들어줄 것이다. 당신의 가장 든든한 엔진이 되어줄 것이다. 그 엔진을 달고 당신은 당신의 결정을 옳게 만들면 될 일이고.


나는 믿는다. 자신을 향한 객관적 시선, 그 시선을 바탕으로 한 상상, 그것이 미래 준비의 시작이라고.


나쁜 질문을 던지면 아무리 좋은 답을 찾아낸다고 해도 우리는 그다지 멀리 갈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좋은 질문을 던지면, 비록 끝내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답을 찾는 과정 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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