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리뷰
수 십년간 못보다가 수년 전에 만났다.
그리고 또다시 수 년간 못보았다.
단지 SNS에서 서로의 행적을 알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벤트”가 생겼고 각자의 휴일을 반납하고 나왔다.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50대 중간의 아제 몇 명은 경복궁역으로 모였다.
조선시대의 풍수지리로 해석하면 민족의 영적존재인 우백호에 속하는 이 땅은 요즘은 “서촌”이라고 불린다. 유년시절과 20대 초반을 보낸 영혼의 고향과 같은 장소이건만 서촌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낮설다.
지역 명문고 “진명”, “경복” 그리고 장소(아직도 백송나무 역사를 외운다)의 역사적 가치, 지역출신 인물에 대해 세뇌에 가깝게 교육시켰던 지역공동체가 있던 곳
우리의 어린시절 행적이 추억이라는 데이터로 저장(push)된 장소(repository)가 서촌이라 불리고 있다. 우리 때는 그냥 청와대 근처 동네(또는 사대문)로 불렸다.
어린시절 이 동네는 무척이나 보수적이었다. 떡볶기 집에 들어가도 주인 아주머니에게 “사대문의 예와 도”를 들어야 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곳이 싫었다. [해비메탈의 영혼을 탑재한 8비트 비디오 게임매니아인 80년대 청소년]에게는 모든 것이 숨막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동네를 떠난 지 어언 30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과거의 친구들과 시간여행을 하며 동네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씩 했다. “이곳이 명물이라고? 우리 때는 이곳의 존재도 몰랐는데?”, “여기가 맛집이야? 넌 여기서 사먹어 본 적 있냐?”, “도대체 너가 살던 집은 어디였지? 이곳이 아니었어?”라는 말을 하며 과거와 매칭되지 않는 지역을 보며 신기해 했다.
길재가 썼다는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의 시조에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라고 하며 변함없는 지역과 없어진 사람들에 안타까워 했지만 서촌은 30년만에 사람과 지역이 모두 변해버렸다. 진정한 젠트리피케이션의 예시가 아닐까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인증샷을 날리며 평범한 거리에 판타지를 느끼고 있었다. 명소가 어딘지 모르니 벌어지는 괴현상이다.
기관에서 좀 더 신경썼으면 좋았을 것 같다.개인적으로 이전 상업은행 자리 앞에다가 “6공의 핫플레이스(효자동 상업은행)”라는 표지글을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내 인생 첫계좌가 여기였다.사회규범에 대한 이해도가 미숙했던 20대에는 그 큰 돈(비자금 4000억)과 내 돈 3000원이 같은 금고에서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괴상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었다(”니 돈 3000원과 내 돈 3000원은 같은 3000원이 아니다”라는 논리였다).
우리가 30대일 때 50대 선배들은 “..라떼”가 “인생의 성적발표”처럼 중요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라떼”는 기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50대는 자신들의 20대처럼 “불안”함으로 가득하다(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점이 있다면 20대에는 “불굴의 의지”가 존재했고 지금은 의지보다는 겸허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라떼”를 말할 여유가 없다. 생각해보니 우리세대는 30, 40대를 제외하고는 인생자체가 “불안과 격변”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정말 예측불가한 시기에 살고있다.
주위에 “대화의 호흡”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쉽게 말해 “남의 말에 경청”하지 못함을 “무례함”으로 받아들이는 지인들이 많다. 특히 우리동네 출신 친구들 중에는 “남의 말을 끊는 행위”나 "마이크를 독점"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 의견만큼 남의 의견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를 한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를 지언정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친구들이 “초중고” 출신이다. 그런 점을 지인들에게 자랑한다. “느그 동네 친구들과 우리동네 친구들은 결이 다르다”라는 말을 사대문 스타일의 SWAG으로 시전할 때가 종종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삶이 다르다. 그러나 각자의 영역에서 불안함을 떨쳐가며 하루하루를 긍정으로 살고 있는 것은 같다. 각자의 삶이 시각에 따라 대단함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닝겐들이 모여 술자리 대화를 만들어갔다. 첫번째는 지긋지긋한 정치와 사회이슈 였다. 참고로 나의 경우, 우리세대의 시대정신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날선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만족한 대화였다고 느꼈던 것은 “질문을 하고 친구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굴 가르치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저급한 행동인지 인생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정치이야기 이후, 과거의 기억과 친구들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3차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술자리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 술을 안먹었다. 한 명만 계속 먹었다. 그럼에도 술자리는 즐거웠다. 각자의 상황이 있기에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즐겁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과 같지 않으면 “공격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는 즐비하다. 그런 점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친구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동네 친구들이 그런 모습이 강한 것일 뿐, 내 준거집단의 사람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없다. 아마도 내가 삶에서 그런사람들을 제외시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최고를 추가"하는 것보다는 "사소한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인생의 스승은 자신이다. 그러나 자신을 스승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동료”이며 “친구”이고 심지어 “적”일 수도 있다. 그들이 큰 깨달음을 주기에 자각과 동시에 배움이 일어난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퇴직”, “연픽(연봉피크)”, “스타트업과 투자”, “자녀들 취업 및 입학”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고의 폭이 넓여졌다. 마치 GPU로 병렬프로그래밍을 하 듯, 짧은 시간에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한 느낌이었다. 도메인이 다른 사람(비전문가)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문제를 전문가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을 듣다보면 “친구(또는 지인)”의 중요성을 꺠닫게 된다. 좋은 친구는 “시간을 아끼는 효과”를 얻게된다.
내 인생의 중요한 요소인 “음악”, “영화” 관련된 스승은 모임에 나왔던 친구 중 한 명이였다. 중학교때 부터 그 친구에게 재즈와 클래식, 그리고 수많은 명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성장했다. 물론 그 친구의 스타일과 다른 영역인 “헤비메탈과 힙합(Nu Metal, Industrial rock), 서브컬쳐”에 심취를 했지만 어찌되었던 음악적 스승은 그 친구가 맞다.
그리고 두 친구와 대화를 하며 “자녀교육”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들의 인생에서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인이 되었는 지 보았기에 그 모습을 보며 “반정도만 따라해도 성공”이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사람을 배움으로 이끄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말로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사람은 “빈수레”가 될 수 밖에 없음을 또 한 번 단디(경상도 사위라 가끔 경남의 단어가 나온다)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