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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쭉이 아빠 Oct 04. 2020

"할아버지 안아줄 때 엄마한테 가고 싶었어"

아빠가 딸에게

"할아버지 안아줄 때 엄마한테 가고 싶었어"

추석날 저녁. 잠자리에서 엄마와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떨던 아이가 갑자기 고백을 했단다. 커다란 초코파이 한 상자를 선물로 받은 아이가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안아준 후기였다. 사진 속 내 아버지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지으셨지만, 그런 할아버지 품에 안긴 아이의 속 마음은 귀엽게도 떨리고 무서웠단다. ㅎㅎ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내 아버지는 나와는 달리 다부진 체격에 목소리가 크다. 그리고 부산 상남자답게 애정표현이 과묵하고 거칠다. 그래서 아이는 더 어렸을 때부터 유독 할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심지어 할아버지와 눈만 마주쳐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이인 만큼 이번에 할아버지를 안아준 건 나름 큰 용기를 낸 것이다.  많이 컷다.

아이에겐 할아버지가 무서운 사람이겠지만, 사실 나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어린 시절의 호랑이 선생님이 아니다. 그렇게 느낀 순간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였다.

예를 들면, 팔씨름으로 아버지를 처음 이겼을 때. 어느 날 무심코 본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쌓인 세월을 느꼈을 때. 어머니 기일날 아버지의 기도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슬프게도 내 아버지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아픈 아내와 어린 자식들 건사하느라 스스로 거친 바위가 되어야 했던 내 아버지는 이제 세 살 손녀 재롱에 세상 가장 행복한 할아버지가 됐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내 심정은 꽤 복잡한데 '감사하고 착잡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지금 어떤 마음이실까? 아마도 내가 내 아이의 자식을 안을 때쯤에야 그 심정을 알 수 있겠지. 그때의 아쥐니 역시 지금 나와 같은 마음으로 제 아비를 바라볼지 궁금하다.

나는 아쥐니에게 어떤 아버지로 기억될까? 내가 벌써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인생 참 빠르게 돌고 돈다.

아쥐나 천천히 자라줘 ㅜㅜ

2020. 10. 04

아빠가 딸에게


#할아버지 #아버지 #나이든다는것 #아빠육아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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