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스위스 베른 아레 강
흐르는 강물이 여유로운 스위스의 도시 베른.
낮에 본 아레 강물이 너무 아름답고 강물을 따라 조깅하고 산책하는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 해가 질까 서둘러 다시 강 아래로 내려왔다.
Altenbergsteg Uferweg, 3013 Bern, Switzerland
에메랄드빛을 자랑하던 아레 강물은 달 빛 만을 머금은 채 까맣게 흩날린다. 강 위에 달이 떴다. 우리 동네에서 보던 것과 같은 초승달일까? 여기 북쪽 베른의 초승달은 미소가 한껏 더 밝고 간드러진다. 그 미소에 취해 달이 나무 아래로 질 때까지 강물 위 작은 다리에 서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 땀 한 땀 그 미소를 가슴에 새긴다. 초승달을 보고 있으면 하늘이 나를 향해 미소 지어주는 것 같아 늘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까만 아레 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에메랄드빛 아레 강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영화 미드나잇 선을 보면 햇빛을 받으면 죽는 희귀병 색소성건피증에 걸린 케이티란 소녀가 나온다. 케이티가 베른에 산다면 아레 강은 늘 달 빛에 아른거리는 검은색 일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아무리 아레 강이 에메랄드빛이라고 해도 케이티는 강이 검은색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아레 강은 에메랄드빛일까, 검은색일까? 계단에 발을 담갔을 때 본 강물은 아무 색깔 없이 투명했다. 그럼 투명할까?
잘 익은 빨간 사과를 보고 난 사과는 빨갛다고 말한다. 내 옆에 앉은 강아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사과는 회색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내 옆에 앉은 친구는 "사과가 아주 빨갛게 잘 익었네"라고 말한다. 내 친구가 보는 빨강이 내가 보는 빨강과 같을까? 색깔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사과가 색깔을 가진 걸까? 아니면 보는 우리의 눈들이 색깔을 가진 걸까? 아니면 반사된 그 빛이 색깔을 가진 걸까? 아니면 색깔은 어디에도 없는 걸까, 단지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는 걸까?
우리가 어떤 색깔이라고 말하던 아레 강은 아무 말 없이 흐른다. 사과가 아무 말없이 있듯이.
아침의 공기는 늘 상쾌하다. 바삭바삭한 아침 공기를 들이쉰다. 기분 좋은 쌀쌀함이 피부에 느껴진다. 아침형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랄까. 해가 올라 공기가 뜨거워지기 전 하루 중 몇 안 되는 이 시간을 즐길 때면 마치 큰 특권을 누리는 양 기분이 좋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지는 내가 고맙다. 베른의 아침 공기는 그 물만큼이나 맛있다. 해가 뜨고 다시 찾은 에메랄드빛을 따라 걷다 보면 이곳 사람들의 여유를 엿볼 수 있다.
강 산책길을 따라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가고 마을 풍경이 지나간다. 아침 조깅을 하는 머리 희끗하신 아저씨와 그 뒤를 한참 뒤에서 엉금엉금 따라가는 멍멍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연인, 두 딸과 노는 아빠, 작은 그네 타는 아이, 산 책하는 아주머니,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와 뒤따르는 아이. 매일 아침 이 길을 따라 산책할 수 있겠다는 상상 하니 여기서 살고 싶어 진다.
조금 가다 보니 작은 벼룩시장이 섰다.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는 이런 이벤트는 선물이다. 큰 도시의 시장과 다르게 한적하고 여유롭다. 파는 물건들을 보니 소박함이 보인다. 집에서 쓰던 물건들도 진열되어 있다. 이렇게 쓰던 물건은 각자 그 속에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런 중고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낡고 헌 물건이 아니라 묻은 손 때만큼이나 오랜 기간 여러 이야기들을 입히고 입힌 새로움이 가득해 보인다.
물건의 가치를 매길 때 그 효용성만큼이나 그 물건에 입혀진 이야기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것을 자주 본다. 때로는 물건이 아니라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산다. 최근 경매에서 낙찰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구세주"는 단돈 60달러였던 가격이 다빈치의 그림으로 여겨지면서 4억 5천만 달러까지 오른 건 그 그림에 덧 쉬워진 이야기의 값이다. 우리는 가끔 그 물건 자체의 가치가 4억 5천만 달러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가치는 그 그림을 그린 사람 다빈치에 따라오는 이야기에 있다. 이 그림이 정말 다빈치의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이 다빈치의 것이고 중요한 그림인지를 믿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그림은 60달러 때나 4억 5천만 달러 때나 변함이 없다. 가치는 그 물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값을 지불하는 사람 사이에서 결정되고 늘 변한다. 딱히 실체가 없다. 가만히 보면 가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값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묻어있는 벼룩시장을 지나 다시 흐르는 강물을 따라간다.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이 참 좋다. 흐르는 강물에는 쉰다는 개념이 없다. 끊임없이 흐른다. '강물'이 흐른다고 말하지만 가만히 보면 오직 흐름만 존재한다. 이 흐름을 '강물'이라고 부른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어떤 것이 무엇을 한다'가 아니라 '무엇의 일어남'이다. '강물'이라는 실체가 있어 그것이 흐른다가 아니라 그 흐름 자체가 강물이고 존재하는 것은 이 흐름이다. 말은 강물이 흐른다고 하지만 이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것은 의미 있다. 작은 차이지만 여기에 세상 모든 존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강 물줄기를 지켜보면 작은 물마루가 일었다가 사라지고 거품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흐름은 끊임없이 변한다.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가만히 지켜보면 어느 한 번 같은 물줄기가 없다. 오랫동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물줄기의 모습은 늘 새롭다. 강물은 늘 흐른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그 강물의 흐름은 늘 거기에 있다. 강물은 흐르고 흐름은 움직임이 없다.
아레강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엽서에 글을 적는다.
Thousands miles from home,
but I never moved.
While enjoying appearance of Aare river flowing,
I read our conversation.
Keep looking the basic of false I and 'Not Two'.
Joyful and beautiful scene is happening.
Everything is moving while No thing is moving.
Looking happens.
수만리 날아와 서 있으나
난 한 치도 움직인 적이 없다.
아레강의 모습을 즐기며
우리가 나누었던 대담을 되새긴다.
"나"라는 허상과 세상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
즐겁고 아름다운 풍경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으나 움직이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니다.
지켜봄은 스스로 일어난다.
횡설수설 같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의 꿈속에 내가 있는 것인지 하며 묻는 장자의 글처럼. 수 천년을 관통해서 보고자 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했다. 여기서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나'가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나'는 사라진다. 아니, 존재했던 적이 없으므로 사라질 수 없다. 단지 원래부터 없었구나 하고 알아챌 뿐. '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사라지면 남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나. 세상 모두를 감싸는 나. 세상 모두 그 자체인 나. 하나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고 말할 때의 나. 알파부터 오메가인 나. 아무 이름도 없는 나.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듯 나를 나라 하면 나가 아닌 나. 지금 여기 늘 있는 그대로인 나.
혹시 이 횡설수설 같은 말이 누군가의 심장에 꽂힐까? 심장에 꽂힌 씨앗이 언제가 꽃을 피울지도..
한 여자가 패들 보드를 타고 유유히 강 위를 지나간다. 작은 아이를 수레에 태워 끌고 가는 엄마와 뒤를 따라 걷는 큰 아이. 나비가 꽃에 앉아있다. 벌들이 그 주위를 돈다. 평화롭다. 이러한 일상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게 늘 일어나는 기적이다. 이러한 기적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참 좋다.
스위스 베른 구글 포토 앨범
베른에서 찍은 여러 사진들을 구글 포토 앨범에 담아 여러분과 나눕니다. 각 사진에서 (i) 링크를 클릭해서 정보를 보면 각 사진의 구글 맵 위치가 나오니 참고하세요. 휴대폰으로 막 찍은 사진들이기에 볼품없지만 필요하면 갖다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