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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솔이제철 Jan 09. 2023

여행의 기술, 싸움을 대하는 자세

북쪽길#3 까미노 순례라고 다 평화는 아냐

직장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2,887km 찐으로 걷는 배낭여행

✅ 프랑스길 Camino Francés (2018)

✅ 피스테라, 무시아 Camino de Fisterra y Muxía (2018)

✅ 은의 길 Vía de la Plata (2022)

✅ 북쪽 길 Camino del Norte (2022)

✅ 영국 길 Camino Inglés (2022)



급격히 줄어든 나의 말수를 엄마 아빠는 견디기 어려워했다.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며 말을 붙이지만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걷는 게 지루했고, 지겨웠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 거리를 두고 걸으면 저만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거나, 역으로 걸어 돌아와 내가 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걸어 나간다. 그들의 시선 반경에 머물러야 했다. 옥죄였다. 나의 짜증 버튼이 눌러지는 순간이다.

(나중에 엄마가 말하길, 내가 은의 길에서 쓰러졌던 기억 때문에 안 보이면 무척 불안했다고)


그냥 혼자 있을 잠깐의 시간과 공간만 있으면 되는데 걸어가는 내내 갇혀 있는 것 같다. 또 숙소 환경마저도 따라주질 않았다. 북쪽길을 시작하고, 가장 빡세다고 하는 초반 구간을 계속 10명 이상의 다인실 알베르게에서 지냈다. 체력은 떨어져 가는데 씻고 잠자는 것까지 제대로 쉬질 못하니 스트레스가 끝없이 올라간다.

기차역사 건물에 있는 데바 알베르게.


북쪽길은 확실히 여행객 연령대가 낮았다. 은의 길은 거진 50대, 60대 이상의 은퇴자가 많았는데, 북쪽길부터는 20대가 굉장히 많이 보인다. 평균 연령이 낮아져서 그런지 알베르게가 무척 어수선하다. 이 루트가 여러 휴양지와 닿아 있기도 하고, 까미노 순례객이 아닌 일반 여행객들도 저렴한 가격에 알베르게를 이용한다고도.

1층 식당에서 밤새 떠드는 소리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알베르게.


심신이 불편한 나와는 상관없이 북쪽길은 단연 아름답기만 하다. 내내 해안도로를 따라 걷고, 산에서 바다를 조망하고, 경치를 즐길 수 있는 모든 각도로 북쪽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지러운 감정을 압도하는 절경의 연속이랄까. 알 수 없는 짜증이 밀려오는 와중에도 지금 보고 지나가는 순간들이 무척 귀한 시간임을 본능으로 알았고, 금방 지나갈 기분에 혹여라도 작은 풍경 하나 놓칠 새라 눈을 부릅 뜨고 다녔다.


그래, 나의 뾰족한 마음을 어서 정리해야겠다. 상노무자식 되기 전에 눈치껏 모드 변경이 필요한 타이밍이다. 스스로에게 당근을 좀 쥐어주기로 했다.


떨어져 있자.

틈틈이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하루 걷는 구간을 모두 마친 후 숙소에 들어갔을 때 침대에 누워있지 않고 잠깐이라도 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나 해소가 됐다. 기껏해야 산책하면서 달팽이를 구경하거나 마트를 혼자 가거나 하는 정도였지만.

비 오는 날, 길가로 나온 달팽이를 100만 마리쯤 구해줬다
커피와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흔치 않다. 헤븐이다.


대충 먹지 않는다.

사실 평소에도 맛집이라든지 음식 메뉴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식사 자체에는 스트레스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맛있는 음식, 좋은 음식점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 여행을 할 때 실패하더라도 이것저것 먹어보는데, 까미노 여행은 식사가 곧 체력이라 가능한 엄마 아빠에게 익숙한 음식을 찾곤 했다. 그러다 보니 늘 먹던 음식만 먹었는데 그동안 이 점이 내심 아쉬웠던 것 같기도 하다.

빌바오에서 갔던 아시안퓨전레스토랑이다. 스페인 현지인이 엄청 많았던 곳인데 그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젓가락 간지를 보여주고 왔다.


원하는 것을 했다.

스스로 나의 역할을 ‘가이드', '돕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까닭에 나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었는지, 이게 아무래도 탈이 난 것 같다. 까미노 여행에 피해가 되지 않은 선에서 내 욕심에 솔직해졌다.

그중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 것이 까미노 여행 중 베스트로 꼽는다. 숙소도 구겐하임 미술관 바로 앞으로 잡았는데, 밤새 창 밖으로 보이는 미술관을 보면서 잠든 날, 이 날은 거의 생일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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