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4월임에도 볕이 강하다. 오늘은 유난히 오전부터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데, 그 흔한 그늘조차도 귀한 날이다. 이 날 목표 지점은 알마덴(almaden)이라는 곳, 30km 뒤에 위치한 마을이다. 우리에게는 고강도의 빡씬 구간이다. 보통 하루 일정을 18~26km로 짜면,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약 4~6시간 정도 걷게 된다. 하지만 마을 사이 거리, 숙소 유무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많이 걸어야 할 때가 있는데, 이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도보 여행을 시작한 지 3일 차 밖에 안된 터라 적응이 덜 된 상태에서 더위와 양쪽 발 물집이 더해지니 체력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12km는 어찌어찌 왔는데 앞으로 남은 18km가 까마득하다. 무엇보다 마을에 닿는 18km 동안 도로만 끝없이 이어질 뿐, 주변에는 가게도 건물도 벤치하나도 도저히 찾아보기 어렵다. 구글 지도를 뚫어지게 들여다봐도 길만 덩그러니 그려져있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퍼져 버렸다. 기나긴 도로의 중간에서, 앞으로 가는 것도 되돌아가는 것도 어중간한 이곳에서 나는 그렇게 퍼졌다.
오늘은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온다. 엄마 상태를 살펴보니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내가 총대를 메면 되겠다, 나는 점프를 해야겠다, 차를 타야겠다.’
하지만 아빠에게는 발로 걸어 완성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아빠의 양해와 동의가 먼저였고, 그래서 제안했다. 내일 이 지점에 다시 돌아와서 여기부터 걷기 시작하자고. (글은 젠틀하게 표현했지만 거의 떼쓰는 것에 가까웠다.)
정오를 지나 더 뜨거워질 한낮의 더위와 앞으로 남은 거리, 그리고 엄마와 내 상태를 보자니 이거 아무래도 오늘은 무리다. 그래, 오늘은 그만하자.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갈 방법이 없다는 거다. 구글을 암만 돌려봐도 이곳까지 택시를 부를 방법이 없다. 뭐 별다른 방법이 있나, 자동차를 얻어 타는 수밖에. 히치하이킹하면 된다고 엄마 아빠에게 큰소리쳤지만 사실 나도 처음이었다.
어쩌다 한 대씩 지나가는 차에 손을 흔들었고, 몇 대는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서너번째였나 차 하나가 멈추었다. 아빠는 내 발이 무척 불편함을 몸짓으로 과장되게 표현했다. 하지만 이미 동승자 셋이 있어 우리가 탈 자리가 없어 보인다. 수가 달리 없어 알마덴까지 갈 택시 부르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니 본인들이 알마덴에 가서 택시를 보내주겠다 한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택시가 오질 않는다. 이거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했을 때 아까 그 차가 저 쪽에서 오는 게 아닌가. 옴마야 우리를 태우러 되돌아온 것이다! 오고 가고 장장 왕복 36km이다.
알고 보니 알마덴에 택시가 없어 마냥 기다리고 있을 우리를 만나러 다시 달려온 거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 본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것, 그리고 말에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
한참을 달려 마을에 도착했다. 이렇게 먼 거리를 왕복하셨구나 싶어 감사한 마음이 코어부터 밀려 올라온다. 나의 스페인어가 아쉽다. 그저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s gracias)만 할 줄 아는 나의 말이 부족하게만 느껴져 눈빛 가득 표정을 담아 최선의 몸짓 언어로 감동을 표현했다.
아빠는 이 날 고마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이렇게 알마덴의 두 사람은 우리의 마음에 각인된 기억이 되고, 다짐이 되었다. '우리도 서울 돌아가면 저렇게 살자'
그들이 차를 돌려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