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안정'이라는 키워드가 우리 삶을 지켜주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창업에 뛰어든 지 3년 만에 ‘뇌혈관질환’이라는 건강 상의 문제를 경험한 뒤로는 왜 사람들이 ‘안정적인 직장’에 목숨을 거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돈은 상대적으로 많이 벌 수 있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의 몸과 시간으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던 셈이다. 자녀를 키워야 하는 가장으로 건강관리를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면서 다시 한번 대학 강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보다 한참 나이 어린 학생들 속에서 함께 공부를 해가며 겪는 고충이 많았지만, 늦은 나이에 취업에 도전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였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안정감을 미끼로 삶을 헌납하는 것처럼 보인 직장인 생활을 이리도 동경하게 될 줄이야. 이런 게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숙명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치열하게 학업에 도전을 이어 나갔다.
이른 새벽에는 매장의 문을 열고 오픈 준비를 한다. 대략의 물품 주문을 마친 뒤, 학업을 위해 대학교로 이동해 어린 친구들 속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수업을 듣지만, 예습조차 홀로 할 수 없는 정도의 학문들로 이루어진 공대 수업은 나에게 외계어나 다를 바 없다. 고작 2~3시간 수업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양의 리포트를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 했고, 주변에 도움이나 조언을 청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생들은 너나 할거 없이 쉽게 구하던 시험 족보는 하늘의 별따기 수준. 그렇게 홀로 고군분투 대학생활을 마친 이른 저녁이면 어김없이 매장 마무리를 업무를 하고 귀가했다. 매주 주어지는 과목별 리포트 수행을 위해서는 잠자는 새벽시간까지 반납했어야 하지만, 가장으로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잠만은 포기할 수 없었고, 그렇게 교수님들에게는 늦은 나이에 복학했지만, 성실하지 못한 학생으로 기억되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생후 3개월이 되던 시점, 일생일대의 공개채용 시즌이 찾아왔다. 늦은 나이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불구하고 학부 과정을 끝까지 버틸 수 있던 배경에는 [취업]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은 별 고민 없이 도전했던 취업 시장에 나는 왜 이리도 오랜 기간이 걸렸을까..” 하는 후회의 시간조차 아까웠을 만큼, 시간이 너무도 귀했던 당시에도 나를 지켜준 것은 하루를 쪼개어 도전하는 나의 습관이었다.
취업에 도전하고자 하는 분야는 [항공 연구개발]이었고, 공개에 지원하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와 더불어 항공분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프랜차이즈 사업 경험이었다. 더군다나 회사 업무 외에 다른 것을 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 회사 특성상,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인한 4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으로 수많은 면접 과정에서 탈락의 고비를 맛보고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탈락하면 할수록 가장으로서의 간절함은 악착같은 ‘투지’로 변하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도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서른의 나이를 앞두고 있었고, 몇 개월 전 태어난 첫째는 ‘대동맥판막증’이라는 심장에 대한 문제가 태아 때부터 발견된 탓에 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출산, 신생아 중환자실 생활을 겨쳐야만 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병원을 다녀야 했던 상황. 이런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자리한 프랜차이즈 사업을 뒤로하고 다시 취업에 도전하겠다며 열을 올리고 있던 나. 이 상황 속에서 아내는 취업을 준비하는 나보다 더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묵묵히 응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9월에 시작된 공채 도전은 12월이 되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탈락한 수많은 회사들 속에 다행히 가장 목표로 했던 회사와 백수가 되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류로 했던 회사, 이렇게 두 곳만 남은 상황이었다. 최후의 보류로 남겨왔던 회사에서도 또 다른 회사의 면접을 준비 중인 나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당장 5일 내로 확답을 주지 않으면 최종 합격의 기회는 없어질 것이라며 엄포를 내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목표로 하는 회사의 최종 합격까지는 인적성과 최종 임원 면접이라는 2가지 관문이 남아있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이 나를 짓눌렀지만, 너무 멀리 돌아온 길목에서조차 나와의 타협에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간절한 마음으로 아내와 상의 없이 보류로 남겨왔던 회사를 과감히 버리고, 대학교 입학 시절부터 목표로 해온 회사에 도전을 이어나갔다. 입사서류, 1차 면접, 2차 면접(전공&영어), 3차 인적성검사, 그리고 4차 면접까지 총 5개의 관문에 나 자신을 갈아 넣으며 밤잠을 포기하는 속에 총 5개월의 도전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매 차수의 면접 결과 확인을 위해 마우스 클릭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이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마우스 커서를 [조회] 버튼 위해 옮겨놓고, 마우스 왼쪽을 클릭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순간. 드디어 기다리던 최종 면접 결과를 확인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등 뒤로 아내가 숨죽인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옆에서는 갓 태어난 첫째 아들이 엄마 아빠의 관심을 위해 목놓아 울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과 함께 누른 ‘탁’라는 마우스 소리와 함께 “축하합니다. 최종 합격되었습니다.”라는 문구를 확인하며, 아내와 아들을 꼭 껴앉고서야 흘렸던 감사의 울음은 아직도 잊지 못한 순간이다.
입사 후 회사 생활을 하며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안정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맛보게 되었고,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장사에 임하던 이전 시절과는 달리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회사와 가정에만 오롯이 집중해가는 속에 그동안 지나쳐왔던 작고 소소한 행복을 되찾게 해준 회사, 그렇게 회사는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로 내 인생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힘들게 공채 과정을 거쳐 합격하게 된 동료들 중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퇴사’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이미 회사 밖의 냉정한 현실을 경험한 나의 마음은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말한다. 회사 월급쟁이로 남아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입사 전 치열한 삶을 경험해본 나에게는 매달 정해진 날짜에 입금되는 고정수입만큼 큰 힘이 되는 것이 없었다. 고정적으로 확보되는 월급에서 갈대같이 흔들리던 안정감을 깊이 자리할 수 있었을 뿐, 월급 액수의 높고 낮음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2020년 1월, 중국 ‘우한 폐렴’에서 비롯된 코로나 바이러스에 전 세계가 팬데믹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직격탄을 맞은 대표 업종에서도 피해가 막심한 항공분야에 내가 몸담은 회사가 있었다. 그리고, 정년 시점까지 부동의 자리를 지켜줄 것만 같았던 회사의 어려운 상황을 보며, 안정감과는 정반대 개념인 ‘고용불안’을 온몸으로 체감하기까지 이르렀다. 어느 한 명 회사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담보해 줄 수 없는 상황.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 그대로 하루하루의 직장 생활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이 따로 없을 만큼 불안이 크게 조성되고 있었다. ‘괜찮아지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던 우리의 자세에 일침을 가하듯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가 깊은 혼란에 빠져만 갔고, 전 세계를 왕래해야 하는 비행기들은 고가의 주기료를 납부하면서 땅 위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땅 위에 머무르는 시간은 예상치 못하게 길어져만 갔고,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영난 아래 나와 같은 임직원들의 고용불안은 날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나의 본업이 흔들렸지만, 맞벌이를 하고 있던 아내 덕분에 다행히 기댈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소소한 삶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아내는 코로나에 의해 본업을 잃게 되었다. 오랜 기간 선수 생활을 마치고 빙상 분야 상임심판을 역임해오던 아내. 코로나로 모든 대회가 연거푸 취소되는 상황 속에서 심판으로서도 설 무대가 없었고, 상임심판 유지의 전제조건인 ‘시합 일수’를 채우지 못하게 되어 견고할 것만 같았던 심판직이라는 본업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게 되었다.
2020년 1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중국 우한발 바이러스가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위협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일이었다.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있고, 우리나라도 집단감염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 속에 언제 사태가 진전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부정적인 기사들이 끊임없이 나올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로 수많은 뉴스를 포함해 모든 매체들이 부정적인 기사를 연일 다루고 있었고, 그런 뉴스 기사에 더 이상 아내와 내 감정을 맡기기 싫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는 7살 아들과 5살 딸. 사랑하는 두 녀석은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노는 모습을 선사하며, 아내와 나에게 근심 걱정할 시간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참 고마운 녀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