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거창한 걸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 좀처럼 손이 안 떼진다. 내가 쓰는 게 다 하찮고 사소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이같은 생각이 글쓰기에 있어서 독이 될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럴싸해 보이는’ 글을 쓰려는 마음은 쉬이 뿌리치기 힘들다. 그럴싸해 보이는걸 쓰고자 하는 마음은 창작자의 숙명 같은게 아닐까. 아무 욕심 없이, 기대 없이 써내기만 하는 글은 ‘배설’에 가까운 글이 될테고, 모든 것을 ‘배설’로 여긴다면 그 어떤 것도 꺼낼 수 없기 때문에. 창작자는 이 딜레마를 잘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배설이 될까 두려워 아무것도 쓰지 못해서도 안되며, 그럴싸한 것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서도 결코 아무 글도 쓸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글쓰기의 핵심적인 축이다. 글쓰기를 연습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가지를 염두해둔 채 글을 쓸 필요가 있다. 이 두가지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글을 쓰는 일 뿐만 아니라 무언가 창조하는 데서 큰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첫번째, ‘내 글이 단지 배설로 끝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기고 글을 쓰는 방법은 ‘배설이 아니라는 확신’을 찾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설’에 가까운 글을 마구잡이로 쓰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모닝페이지라는 방법을 통해 연습했다. 줄리아 카메론의 저서 <아티스트 웨이>에 소개된 방법이다. 이름은 뭔가 거창하지만 별 것 없다. ‘이게 배설인가 아닌가’ 생각도 들기 전에, 책의 표현으로는 내 안의 검열관이 깨어나기 전에 글을 쓰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눈을 뜬 직후 A4용지 세 장을 쓰면 된다고 한다. 뭘 쓰냐고? 말 그대로 ‘배설’에 가까운 글을 쓰면 된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 없다. 나의 모닝페이지는 간밤에 꾼 꿈 내용이 되기도 하고, 바깥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되기도 하고, 책상 위의 상태를 묘사하는 글이 되기도 한다. 정말 무엇이든 상관없다. 단지 꺼내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 진짜 ‘배설’과 닮아있지 않은가?
다만 책에서는 ‘세 장’이라고 분량을 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에 따라 적절히 조정하면 좋을것 같다. 나는 글씨가 크지 않고 상대적으로 큰 노트를 사용해서 A4용지로 세 장이면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 출근을 앞두고 매일 그만큼 시간을 할애하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으니, ‘세 장’이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멈춰서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쓴다.’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모닝페이지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생각하느라 글을 멈추는 것이다. 이 과정에 소위 말하는 검열관이 끼어든다. ‘야, 거봐 그거 그냥 쓸 필요도 없는 글이라니까?’, ‘손가락 아프게 아침부터 뭐 하고 있는거야.’, ‘그냥 시사 상식이나, 저기 놓인 책 같은거나 몇 장 읽자.’ 같은 말들을 건넨다. 모닝페이지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틈을 주면 안된다. 나의 경우는 40분이라는 시간을 정해두고 멈추지 않고 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처음에는 검열관이 건네는 말이 꽤 크게 들린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거의 들리지 않는다. 검열관의 훼방소리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처럼 소리를 인지하긴 하지만,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람마다 출근 시간이 다르고, 소요되는 시간도 다를 테니 모닝페이지를 쓰는 시간은 개인이 상황에 맞게 조절하면 된다. 나의 경우 24시간 중 2시간을 떼어 독서와 글쓰기에 할애하기로 하였고, 그 중 1/3을 모닝페이지에 할애했다.
자유로운 ‘배설’ 연습이 잘 되면, 내 안에서 뭔가 꺼내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다. 나의 경우 모닝페이지를 2년 6개월 정도 매일 썼는데, 초창기 모닝페이지와 지금 모닝페이지를 읽어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초창기 모닝페이지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한다. 누가 읽는 것도 아니고, ‘잘 쓰라’고 한 글도 아니지만 여전히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표현만을 사용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꺼내는 데 자연스러워지고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 반복해서 등장하게 된다. 당장 결과를 보장하는 형태의 활동은 아니지만, 반복하여 자신을 꺼내는 연습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든 좀 더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끝없이 ‘더 나은 것’ 혹은 ‘효율적인 것’을 강요하는 지금 시대가 아닌가. 이에 반해 모닝페이지는 단지 배설을 할 뿐이니 더 나은 것에 대하여 따지지도 않고, 효율을 따지기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이 활동은 오롯이 자신을 위한 것이다. 생각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통로이며, 창조성을 되찾는 도구이다. 나의 경우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가장 많이 싸웠던 대상은 ‘뭔가 생산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내고, 하다 못해 돈이라도 몇 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생각. 창조성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유로운 표현 같은 건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책 몇 줄 읽은것보다 더 성과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모닝페이지가 주는 자유로움, 자기다움에 근접해 가는 감각, 아침 첫 시간을 가장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들이 이 일을 지속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현대인의 가장 큰 강박은 ‘뭔가’ 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우리는 놀면서도 놀지 못한다. 쉬면서도 쉬지 못하고, 쉬는 김에라도 뭔가 눈에 보이고 ‘도움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가.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목표를 가지고 거기를 향해 매진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게 아끼고 효율적으로 산 결과는 무엇인가. 아껴놓은 시간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한 번 쯤, 우리 자신에게 작정하고 배설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루 1440분 중에 단 40분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그게 최소한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좀 잘 쓰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사실 이 질문은 ‘내 글이 단지 배설일 뿐이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과 결이 같다. 첫 번째로 제시한 방법은, 잘 쓰고 싶어서 못 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배설’ 방법이다. 그렇게 계속 뭔가를 쓰다 보면 ‘좀 더 나은 것’ 혹은 ‘언젠가 써 보고 싶었던 것’ 같은 생각들이 떠오르고, ‘더 잘 쓰고 싶어’ 지는게 수순이다.
이때는 무작정 쓰는 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자유롭게 꺼내는 연습이 된 후에는, 잘 읽는 연습이 필요하다. 맞다. 뻔한 이야기.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 좋은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자신을 꺼내는 일이었다. ‘틀리면 어쩌지?’, ‘이런 쓰잘데기 없는 글이나 쓰고 있을 땐가?’ 하는 생각과 늘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모닝페이지로 자신을 비워내다 보면 어느 순간 고갈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거나 표현하는 단어가 늘 비슷해지고 쳇바퀴 도는듯한 느낌도 든다.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잘 살아야 한다. 쓰려면 먼저 자신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삶을 잘 살고 난 사람들 중에 일부가 자신의 삶이나 생각을 ‘표현’해 놓은 것이 책이요 글이다. 잘 쓰려면 결국 읽어야 한다. 이렇게 쓰기와 읽기를 병행해 가다 보면, 조금씩 더 나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나는 글쓰는 내가 좋다. 쓰기는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단지 ‘말 잘듣는 사람’, ‘예스맨’, 어떤 기준에 부합한 사람에서 나다운 사람으로 살도록 도와 주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이제는 외부에 있는 기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나름의 이유를 갖고 한다. 故신영복 선생님 표현을 빌리면 ‘자유란,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데, 글쓰기가 나에게 자기의 이유를 선물해 주었다. 나는 쓰면서 나를 표현해내고, 읽으면서 또 나를 채워 간다. 쓰고 읽는 과정에서 점점 나는 성장해 가고 나다움에 가까워 간다.
표현하고, 배우는 일이 비단 글쓰기에만 국한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글쓰기가 아닐까. 그림이든, 춤이든, 노래든, 무엇으로도 자기를 표현할 수 있지만 가장 많은 이에게 열려있는 방법은 단연 글쓰기일 것이다. 쓰고 읽으며, ‘살아야 되는 삶’이 아니라, ‘살고 싶은 삶’을 살다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