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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Aug 17. 2023

예비군 훈련장에서 글 쓰기

관찰하며 쓰기, 일단 쓰기 실천

   33살인 나는 아직 예비군 훈련 대상이다. 늦은 입대가 불러온 또 하나의 결과는 바로 예비군도 늦게 끝난다는 것이다. 전역 후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하는 남자들에게, 예비군 가는 날만큼 지루하고 비생산적인 날은 없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쉬는시간마다 인터넷을 뒤적이거나 잠을 잤겠지만 오늘은 주변을 둘러보며 글을 한편 써보려고 한다. 오래전부터 예비군 훈련에 참석하면서 특이하다고 느낀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비군 참석자들의 외모가 독특하다는 점이었다. 일상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유독 예비군 훈련장에만 그런 사람들이 눈에 띄는 건지, 늘 의아했다. 이유는 아직 잘 모르지만, 오늘도 눈에 띄는 외모가 많을 것이고, 그분들을 관찰해서 글을 쓰면 재밌을 것 같다.


   집에서 걸어 나오면 훈련장까지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입소 10분 전이나 되어서야 집에서 출발했다. 그때까지 뭘 하고 있어서 급히 나갔다기보다는 조금이라도 훈련장에 덜 머무르고 싶은 마음에 딱 맞춰 나갔다. 집결지에 가까워 가니 군복을 입은 예비군 무리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동네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지 안부를 묻는다. 저마다 반가운 표정이다. 최근엔 들을 기회가 별로 없던 제주 사투리도 종종 들린다. “어떵 지낸?” (어떻게 지냈어?) “야이 무사 영 살쪈?” (얘는 왜 이렇게 살이 쪘어?) 네이티브 도민은 아니지만 몇 마디 주워 들어 본다. 나처럼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도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핸드폰을 쳐다보며 입소 절차 밟고 있다.


   예비군 훈련장은 입소 단계부터 범상치 않다. 신분증을 안 가져와서 핸드폰 속에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 줄 만한 게 있는지 찾는 사람이 세네 명 정도 등록 데스크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 뒤를 따라 금발이긴 하지만 노란색 보다 흰색에 더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진, 장발의 사나이가 등장했다. 이 분은 사복 차림에 신분증도 없어서 아마 본인을 증명하는 데에 더 어려움을 겪게될 것 같다. 읍대장은 금발 남자더러 이러시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해 보지만 별다른 수가 없는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모습도 다양하다. 평소라면 마주칠 일이 없는 외모를 가진 사람도 여기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장발은, 과장을 좀 보태면 열에 한 두 명은 꼭 있다. 심지어 예비군 소대장이라는 간부 전역자는 꽁지머리를 하고 있다. 20대 초반에 입었던 군복이 늘어나는 뱃살을 감당하지 못해 상의는 물론이고 바지 자크도 거의 다 푼 사람도 꽤 많다. 어깨 정도 길이의 염색 머리에 베이비펌을 한 사람도 있다. 도심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렵고, 어촌에 가까운 읍 지역이라 그런지 새카맣게 탄 사람도 꽤 많다. 집-회사만 반복하는 생활에서는 다들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비주얼이다. 


   나의 편견일 수도 있으나 장발장, 꽁지머리, 탈색머리를 하고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예비군 5년 차이니, 모르긴 몰라도 대학생은 거의 없을 텐데. 이들은 어떤 형태로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시간을 딱 맞춰서 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소강당 안으로 들어서고 보니 아뿔싸, 제일 앞자리만 남았다. 내가 한 가지 잊은 사실은, 다들 예비군 훈련장에 오래 있기 싫어할 뿐만 아니라 불편한 앞자리에 앉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이야기를 또 들어야 할 텐데, 제일 앞에 앉아서는 맘 놓고 졸기도 미안하기 때문이다. 입소 시간을 30분쯤 넘겼을까, 읍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기온이 높은 관계로 야외 훈련을 해야 하지만 본인 권한으로 생략한다는 멘트와, 술 마시고 들어온 예비군 한 명이 퇴소조치 되었다는 말을 경고조로 전한다. 실내는 장정 100명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했다. 기능을 못하는 에어컨은 강당을 더욱 후끈하게 데우고 있었다. 


   예비군 훈련장은 참 이상하다. 간밤에 잠을 못 잔 것도 아니고, 잠을 자기에 편안한 환경도 아닌데 졸리다. 여기선 무엇이든 15분 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다. 제일 앞줄에 앉아 시작부터 잠을 청하거나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기가 미안해서 나는 꼼짝없이 졸음과 싸워야만 했다. 한차례 읍대장의 당부사항이 이어지고, 이내 휴식시간이 되었다. 다들 몹시 더운지 손부채를 연신 부치고, 밖도 꽤나 더울 텐데 우르르 몰려 나가는가 하면, 창문을 열어 바람이라도 통하게 하려는지 제각기 가까운 창문을 열어젖힌다. 


   좀 더 주위를 둘러보니 흡사 아랍인을 연상케 하는 수염을 가진 남자도 있다. 오늘의 비주얼 왕은 이분이다. 속으로 생각해 본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까 금발의 장발남은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읍대장이 장난기가 절반 정도 섞인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는다. 대대본부에서 지시사항이 내려왔는데, 온도지수가 야외훈련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니 예정대로 야외훈련을 진행하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 멘트는 아주 진부하다. 자신의 직권으로 실내 교육을 할 거라는 선심성 멘트를 위한 사전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빔 프로젝터 장비가 말썽을 부린다. <예비군의 역사>라는 영상을 10분 남짓 보았을까. 연결된 빔 프로젝터가 꺼져 버렸다. 예비군들은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꺼낸다. 예비군 중 한 명이 장비를 다룰 줄 아는지, 이래저래 프로젝터를 만져보지만 내가 보기엔 전원을 눌러보고 전선을 꽂았다 뺐다 하는 정도로 밖에 안 보인다. 이내 포기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핸드폰에 열중한다. 읍대장은 돌발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론가 갔는데, 누굴 데려올지, 아니면 새 장비를 가지고 올지 기대가 된다. 아까 선심을 쓰듯 야외 훈련은 안 하겠다고 했으니 이제와 장비 불량을 이유로 나가자고 하진 않을 것 같다. (아마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읍대장이 돌아왔다. 아침까진 잘 됐는데 여러분 열기가 뜨거워 장비가 고장 났다며 진부한 멘트를 날린 뒤 예비장비를 가져오겠다고 한다. 30분 정도 걸릴 예정이니 휴식을 주겠다고 한다. 아마 지금 가져온 게 제일 좋은 장비일 텐데, 과연 30분 뒤에는 영상 시청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돌발상황 때문에 쉬는 시간이 너무 길다. 더위에 지친 예비군들은 바깥바람도 쐬고, 편의점 가서 음료도 한잔씩 해보지만 더위를 달래기는 역부족인가 보다. 대부분 줄어드는 핸드폰 배터리를 아껴가며 웹툰을 보거나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예비장비가 도착했다. 훨씬 더 오래된 보이는 프로젝터다. 읍대장이 시험 삼아 설치 중이다. 작동이 되긴 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부디 오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땀이 이마에 맺히고,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매미 울음소리가 더운 열기와 만나 인내심을 갉아먹고 있다. 땀이 옷을 적신다. 온몸이 습하고 더운 공기는 100명의 장정이 뿜어내는 열기를 한껏 머금고 강당 내부를 데우고 있다.


   더위가 한계치에 다다랐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온몸에 갖가지 그림을 그린 남자가 바지를 벗자, 읍대장이 지적한다. “예비군, 그래도 바지는 입읍시다.” 몸에 그림을 잔뜩 그리긴 했지만 앳된 얼굴을 가진 남자는 너무 더워서 어쩔 수 없다며 항의조로 얘기해 본다. 그래도 별수 있으랴. 아무리 그래도 바지를 벗는 게 당당한 행동은 아니니 부끄러운지 다시 주섬주섬 입는다.


   이후로는 같은 일의 반복이다. 읍대장이 썰렁한 멘트를 가끔 하고, 예비군의 역사나 전투방법 같은 영상을 시청한다. 영상이 끝날 때마다 쉬는 시간을 갖고, 나갈 때는 일찍 온 순서대로 나간다. 열심히 영상을 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집중하기가 어렵다. 


   제일 앞이라 여러 사람을 관찰하기는 어렵지만 힐끗힐끗 보면서 훈련장의 모습을 글로 남겨본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다 모여있다. 교육은 재미가 없지만 사람을 보는 일은 참 흥미롭다. 


   누구나 자신의 환경 속에서만 살아간다. 모두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제각기 속해있는 환경도 다르고, 교육 수준도 다르고, 살아가는 시간대도 다르다. 나도 내가 속한 세계에서만 살고 있다. 예비군 훈련이나 군 입대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모두 나처럼 사는 줄만 알았는데 다른 인생도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말이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인격적인 교제는 이뤄지기 어렵지만, 적어도 관찰을 통해 인식을 좀 더 넓혀볼 수 있다. 예비군 아저씨들을 보면서 다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겠구나 생각해 본다. 겉에서 보기에는 다 똑같은 군복을 입은 아저씨지만 안을 조금 들여다보면 군복조차도 다 다르게 생긴 개인이다. 


   오늘 관찰을 통해 몇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먼저는 내가 많이 변했다는 점이다. 나는 완벽주의자 성향이 조금 있었다. 뭘 하려면 다 갖추고 시작해야 했다. 시끌벅적한 곳에서 땀을 흘리며 폰으로 토막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100%가 되지 않으면 잘 시작하지 못했고, 그래서 잘 실패하지도 않았지만 좀처럼 시도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글을 쓰면서 많이 변하고 있다. 잘 쓴다는 기준 자체가 애매해서, 잘 쓰려고만 하니까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이 쓰고 싶으니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했다. 시간이 많건 적건, 생각이 진부하든 참신하든 일단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 배우고 있다. 


   다음으로는 세상이 단조롭고 똑같아 보이는 것도 내가 보기 나름이라는 깨달음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남과 같이 살고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다 비슷해 보였다. 범주를 너무 단순하게 설정해서 실제로는 한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도 같은 틀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같다. 마치 세상이 직장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그런데 나다움을 생각하고 내 인생의 고유함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같은 직장에 다니고, 비슷한 인생을 살고, 어쩌면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더라도 그 안에 이야기는 다 다르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같은 군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아도 다 다른 이야기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뻔한 내 일상이나 경험도 특별한 하나의 인생이고 새로운 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워서 힘든 예비군 훈련이었지만 어찌어찌 이렇게 또 글 한편을 썼다. 흥미로운 것도 잘 모르겠고, 유익한 건 더욱 아닌 것 같지만,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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