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셉 Aug 19. 2023

바보만 아는 비밀

바보처럼 살고 바보처럼 쓰고

    창밖 너머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오늘이 밝았다. 깊은 잠, 이 잠은 아주 깊어서 어제와 오늘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어둠이 물러가고 잠에서 서서히 깨어난다. 깜깜한 껍질 내부에서 알을 깨고 나온다. 정신이 먼저 깨어나고, 그 뒤를 따라 몸의 세포가 따라서 깨어난다. 오늘이 왔다. 잠들기 전에는 내일이었던 지금, 그러나 늘 오늘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를 수 있는 하루를 맞이한다. 어제와 오늘은 일견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깊은 틈으로 단절되어 있다. 어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마치 두 개의 대륙 사이에 생긴 거대한 틈과 같다. 아득하게 깊고 넓어서 결코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는 틈이다. 어제는 늘 어제로 남고, 오늘 맞이하는 오늘은 매일이 처음 겪는 하루인 이유이다. 어제에 연하여 이어지는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뜯은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만을 위해 준비된 선물꾸러미이다. 


    침대를 빠져나와 기지개를 쭉 켠다. 투명한 물을 한 잔 컵에 따른다. 집안 구석구석 들어온 햇빛이 나를 맞이한다.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창문 바깥의 자연을 바라본다. 아침의 햇빛은 흰색 빛에 가깝다.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저 멀리 푸르른 나무들을 눈으로 만끽한다. 간밤에 내린 비로 촉촉이 젖은 아스팔트, 저마다 지저귀는 새소리, 길게 옆으로 늘어진 구름, 바다 내음을 한껏 머금은 바람, 모든 것이 새것이다. 마치 오늘 태어난 사람처럼, 오늘뿐인 사람처럼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 힘이 솟는다. 활력이 넘친다. 


    감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고 싶다. 인생이 때로 무미건조한 듯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인생이 무미건조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상은 바보에게는 호기심 천국이지만, 똑똑한 사람에게는 뻔한 어제의 연속일 뿐이다. 나는 너무 똑똑하게 살아왔다. 내 세계에는 죄다 아는 것들 뿐이었다. 어제도 오늘 같았고, 내일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았다. 세상은 단 한 번도 같은 색을 보여준 적이 없지만, 나는 형형색색의 다름을 모두 같은 것으로 여겼다. 하루를 맞아도 감격하지 않는다. 오늘이 왔다는 사실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새로 떠오른 태양도 어제의 그것과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미건조했다. 


    글을 쓰면서 감격을 되찾았다. 힐끗 보지 않고 유심히 쳐다보니 달랐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달랐다. 심드렁하게 보였던 세상이 손 끝과 머릿속에서 새롭게 창조되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정도 바보인 사람만이 세상을 신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사실 진짜 바보는 바보짓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좀 바보로 살고 싶다. 어제 봤던 거지만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들여다보고 싶고, 안되는 것을 뻔히 알지만 바보같이 꼭 한번 해봐야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싶다. 너무 똑똑하게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바보짓을 할 여유가 없다. 실패할 것을 알기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다. 이상한 글이 나올 것을 알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잘 못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겉에서 보면 이들은 좀처럼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이 사람들이야말로 바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너무 똑똑하면 글을 쓸 수 없다. 다 어제 일어났던 일이고, 누구나 아는 내용이고, 뻔한 일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보는 뭐든 쓸 수 있다. 왜냐하면 모조리 처음 보는 것들, 처음 해보는 경험뿐이기 때문이다. 바보의 세상은 어린아이가 보는 세상이다. 


    솔직히 말해서, 글을 쓰면서 바보가 된 건지, 바보가 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지 모르겠다. 왠지 지금도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걸 보니 아마 글을 쓰면서 더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 매일 앉던 책상에 앉아서 매일 쓰던 내 노트북을 켜놓고, 내 글쓰기 앱에, 까만 배경에 흰 글씨까지 모두 내가 아는 것들이지만 다 처음 같고 낯설고 설렌다. 


    글은 내게 바보가 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는 책을 한 권 읽어도 뻔한 내용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작가가 내 앞에 살아있는 것처럼 새롭다. 싱글벙글 책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같다. 글을 쓰려고 보니 세상이 모두 달라 보인다. 무인도에 갇혔다가 탈출한 남자의 이야기, <Cast Away>에 '오늘은 또 조류가 무얼 가져다 줄지.'라는 대사가 나온다. 사람도 없고, 매일 같은 바다에 갇힌 사람에게도 오늘은 새로운 것이다. 오늘 만났던 것들은 대부분 내 기억 속에 있던 것들이지만 기억과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표현해 버리고 나니 너무 진부하다. 어쩔 수 없다. 정말 좋은 생각이다 싶어서 글로 잡아놓고 보면 늘 이렇다. 


    바보처럼 한번 써보면 어떨까. 쓰는 게 아직까지 좀 망설여진다면, 바보처럼 생각이라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처음 세상을 만난 아이처럼 방방 뛰어보면 어떨까. 그러다가 한 번쯤 바보짓을 해보고 싶다면, 글을 한편 써보는 건 어떨까. 바보는 형식도, 체면도, 교훈이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그런 것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 세상을 본 바보의 눈으로 써보면 어떨까,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나는 계속 바보처럼 살 것이고, 바보 같은 글을 계속 써볼 계획이다. 


   기대된다. 인생의 조류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 지. 글쓰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 지. 나만이 열수있는 문을 열고, 멀리까지 다녀오고 싶다.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라는 호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