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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Oct 17. 2023

'기억이 난다'로 글을 시작해 보세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 나오는 조언대로 써보자 #1

‘기억이 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 본다. 그러다가 중요한 기억이나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간다. 멈추지 말라. 계속 적어라. 그 기억이 오 분 전에 일어났던 일이든 오 년 전 일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이 당신이 쓰는 행위를 통해 기억으로 다시 살아나게 만들라.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중에서 -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만 한다. 글쓰기의 수많은 기술과 기법들은 모두 글을 쓰기 위함이다. 일단 글을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글 쓰는데 저항감이 있는 나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글을 쓰려고 애쓰고 있다. 글쓰기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에는 글쓰기를 시작하도록 하는 동기부여와 실용적인 조언이 가득하다. 오늘은 그중 한 가지 방법인, ‘기억이 난다.’에서 시작해 보는 글을 써 보았다. 일단 써 보자, 모든 것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기억이 난다. 백 통 가까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서 보내고 처음으로 합격 통보를 받던 날이 기억난다. 태양이 꽤 높이 떠 있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그 근처 자취방에서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불합격 통보를 수도 없이 받던 때였다. 자기소개서를 쓰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답답한 나날들을 보냈다. 이따금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할 때엔 무언가에 쫓기듯 뛰쳐나갔다. 자취방에서 조금 걸어가면 강변을 따라 산책로가 있었다. 수 킬로미터 이어진 강변을 아무 생각 없이 지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평일 오전, 강변에는 산책 나온 노인들이 많았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미친 듯이 달렸다. 그날도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아침을 챙겨 먹는 습관은 없었으므로 아마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때는 4월 초순이었고, 이미 많은 기업에서 불합격 통보를 해 온 뒤였다. 입사 지원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반복되는 불합격에 의기소침해 있었다. 합격 발표가 몇 군데 남아있었지만, 이마저도 안되면 후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마음은 급했고, 거듭 고배를 마신 턱에 사회로 나갈 수나 있을까 불안감이 증폭되던 시기였다. 


달리고 또 달렸다. 5km쯤 달렸을까, 큰 다리 밑을 몇 번 지났다. 땀은 흐르고, 뛸 힘은 없는데 여전히 속은 답답했다. 벤치에 앉아 뒤로 손을 짚고 위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숨을 깊이 쉬었고, 잡히지 않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때였다. 문자가 한 통 왔다. 입사지원 서류에 합격했으니 면접 일정을 안내해 준다는 문자였다. 첫 번째 서류합격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때까지 단 한차례도 서류 전형에 통과하지 못했다. 날아갈 듯 기뻤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갔던 길을 날듯 되돌아왔다. 자취방에 돌아와 문자를 거듭 다시 확인하고,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면접 예상 질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나요?’라든지, ‘다른 곳에서도 합격 통보를 받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같은 지금 생각하면 속이 빤히 보이는 그런 질문들에 하나 둘 대답을 준비했다. 그 이후 며칠이 지나면서 지원했던 다른 기업에 모두 탈락했으므로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이 기업 하나뿐인 셈이 되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각에 나는 점점 조급해졌고, 내 예상 면접 질문 목록은 점점 길어져만 갔다. 


‘이것뿐이다.’ 고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를 잃는다. 넓게 보는 시야를 잃어버린다. 철저한 근시안이 되어 눈앞의 일밖에 생각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회상하면 왜 그렇게 목메었나 모르겠다. 아마 아빠가 돌아가셨기 때문인 것 같다. 첫 서류 합격으로부터 6개월 전에, 아빠는 돌아가셨다. 든든한 버팀목이 사라졌다. 그래서 더 급했던 것 같다. 빨리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엄마 짐을 좀 덜어드려야 한다는 생각만 앞섰다. 급히 가면 잘못 가고, 실제로도 급히 간다고 빨리 갈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땐 그랬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직장이 제주도인 것도, 면접을 보기 위해 제주도에 가야 한다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면접 비용도 따로 지원되지 않았다. 군대 동기 중에 제주 호텔에서 일하던 친구가 있어 친구 편을 통해 숙소를 한 군데 얻고, 면접 전날 비행기를 탔다. 


면접 전날 도착해 회사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나를 아는 이 없지만 이마에 면접 지원자라고 붙인 것 마냥 어색하게, 손님인 척 주위를 서성거렸다. 내가 지원한 회사는 면세점이었는데, 평소 면세나 유통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브랜드 이름조차 생소했다. 두리번대며 몇 가지 특징을 메모했다. 어떻게든 합격하는 게 목표였으므로, 면접관들에게 ‘나 그래도 이 정도 노력은 했소.’라고 언급하기 위한 용도였다. 업장 내부는 재래시장의 장날을 방불케 했다. 발 디딜틈이나 겨우 있을까, 잠시 걸으면 사람과 부딪히기 일쑤일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사무실엔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매장만 살펴보았다. 남직원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손님들은 어떤 사람이 많은지 이런 것들을 메모장에 몇 가지 적었던 기억이 난다. 


30분쯤에서 한 시간쯤 둘러보고는, 숙소를 제공해 준 친구와 함께 문을 나섰다. 렌트해 둔 차를 타고 바닷가를 구경했다. 친구와 이야기도 나누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해물 뚝배기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특별할 것 없는 맛이었는데 가격은 매우 특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와서야 덧붙이는 거지만 제주 바닷가 근처에서는 물가가 1.5배쯤 더 오르는 것 같다. 아무튼 그때는 음식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긴장 상태였기 때문에, 그 외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또 기나긴 면접 질문 목록을 펼쳐 들었다. 읽고 또 읽고,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럴 것까지는 없었다 싶어도, 사회 첫 발을 내딛는 이십 대 청춘의 그림으로는 자연스러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하니 풋풋함에 귀엽기까지 하다. 픽 웃음이 난다. 


숙소에서 면접장 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고, 호텔에서 일하는 친구도 새벽에 출근해야 했으므로 우리는 일찍 헤어졌다. 긴장한 것 치고는 피로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선잠을 잔 뒤 새벽에 일어나 또 질문 목록을 되뇌었다. 시간에 맞춰 옷을 입고 머리를 만졌다. 빌려둔 차를 몰아 면접장으로 가는 새벽녘의 공기가 아직도 내 폐 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새벽 찬 공기에도 소리가 난다면 왠지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면접장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안내 테이블도 아직 설치되지 않아서 면접 도우미 분들과 함께 준비했다. 그들이 질문 몇 가지를 했지만 무슨 질문인지 또 내가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잠시 테이블을 설치하고는 금세 자리에 앉아 또 질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나 둘 지원자들이 면접 대기장으로 들어왔다. 면접은 1,2차로 나누어 두 번 진행되었다. 오전 면접 한 번, 그리고 간단한 식사 후에 오후 면접이었다. 1차는 인사담당자와 부장급 관리자였고, 2차 면접은 법인 대표이사와 총괄 책임자였다. (이것도 당시엔 몰랐다. 대충 감으로 누구한테 권한이 있나 이런 생각은 했다.) 지원자 세 명에 면접관 두 명, 면접이 시작되었다. 거의 한 달 전부터 만들어 둔 질문 목록이 빛을 발할 시간이었다. ‘자기소개해보세요.’라든지 ‘지원 동기’, 그리고 ‘방금 했던 말 외국어로 해보세요.’ 같은 것들만 잔뜩 생각하고 있었다. 잔뜩 얼어 있는 내게, 면접관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 아침 나설 때 누가 배웅해 줬나요?” 그때부터 머릿속이 하얘졌다. 면접관 딴에는 시작 전에 긴장해 있는 지원자들을 좀 풀어주려 했던 것일 테지만, 얼음 그 자체였던 나는 그 말에도 ‘정답’을 찾아 혈안이 되었다. 정답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육지에서 어제 왔고, 그래서 혼자 왔다고 편히 대답했으면 될 것을 실제로 배웅해주지도 않은 엄마 얘기에 군대 동기 얘기까지 한 것 같다. 면접관에겐 요즘 말로 ‘TMI’ 정보가 되었다. 긴장이나 좀 풀어주려고 했던 질문인데, 오히려 더 분위기를 굳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기억이 안 난다. 거의 발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지원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만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를 제외한 둘은 여자였는데, 얼어있는 내가 만만해 보였는지 내가 짧게 대답한 말에 기어이 사족을 달아 나를 끌어내리려 했다. “저는 지원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말만은 똑똑히 기억난다. 내가 뭘 잘못말했나 싶었다. 면세점 경험이라곤 없는 나는 어수룩했고, 잘 몰랐다. 아마 그 둘은 면세점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했었던 건지, 기본이라는 듯 내 말에 반박했다. ‘이거 완전히 망했다.’ 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때부터 편해졌다. 놓으면 편하다는 말은 이때 하는 게 아닐까. 이미 면접은 꽤 진행된 데다가,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어떻게 되겠지.’ 마음을 놓고 면접에 임했다. 다행히 학점 빼고는 스펙 점수가 좋은 편이었고, 하루 전날 업장에 와서 메모하며 둘러보았던 점이 면접관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질문하던 면접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드는 순간이 기억난다. 그때부터 긴장이 풀렸고, 질문 목록 같은 건 생각지 않고 편하게 대답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전체 분량으로 치면 70% 정도는 얼어서 벌벌 떨었고, 나머지 30% 정도는 그나마 편하게 대답했다. 내용이 옳고 그른지, 몇 점 짜린지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지원자들은 제주에 연고를 둔 사람이 아무래도 많아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주도민도 아닌데 제주까지 면접을 보러 오는 것 자체도 흔치 않은 일이기는 한 것 같다. 그들은 서로 알은체를 몇 번 한 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돌아갔고, 나는 아쉬운 마음과 긴장한 마음을 붙잡고 공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 기회였고, 안 되면 또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면접을 아주 잘 본 것 같지도 않았기에 누가 물으면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 면접 질문을 복기해 보다가, 별로 복기할 것도 없는 것 같아 내버려 두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나는 열여덟 살에 처음 제주도를 다녀왔다. 수학여행으로 갔는데, 흑돼지를 먹은 기억 외에는 여기가 제주도구나 생각했던 기억은 전혀 없다. 아무튼, 면접 때문에 제주도가 먼 줄도 모르고 훌쩍 떠났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때가 두 번째 제주도 방문이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아 들고는 뛸 듯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일에 대한 고민은 없었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돈을 주는 곳이면 어디든 괜찮았던 것 같다. 어찌 됐건 고용되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고, 조금은 덜 불안해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렇게 나의 제주 라이프, 첫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좀 더 지났다. 어느 평일 오후, 제주 주택가가 밀집된 지역의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그 사이에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경력 4년 차가 되었다. 일에 대한 고민 없이 돈이나 벌어먹고 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자리는 어느새 ‘일’에 대하여 고민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사춘기라면 사춘기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하며 치워 둘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다른 면을 보고 살아야 하나 싶었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회사를 나와서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보다, 회사에 이대로 남아 세월을 보내는 것이 더 겁나는 일이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생각하게 되었고, 뛰어들듯, 쫓기듯 입사한 곳에서 되돌아 나왔다. 내 고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며, 평생에 걸쳐 안고 가야 할 질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나 아닌 누가 대답을 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세상 3만 개의 직업 가운데 하나를 누가 나 대신 골라 줄 수 있다는 말이며,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누가 말해 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묻지 않으면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이다. 남의 인생을 모방하는 것으로는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삶이 값진 것이라면 그보다 훨씬 못한 것을 위해 평생을 다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거야 말로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값진 것을 받아 들고는 그보다 훨씬 못한 것을 위해 다 사용해 버린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삶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멈췄고, 타인의 인생을 모방하기 위해서가 아닌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은 단순히 기록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행위이며, 나를 들어주는 따뜻한 활동임을 깨닫게 되었다. 복잡한 생각도 지면에 옮기다 보니 정리가 되었고, 평생 글 쓰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리저리 뒤엉켜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청소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몇 년간은 이런 감정이 뒤엉켜 있는 글을 쓴 후에야 글다운 글을 쓸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며 지내다가 마침 새 일자리를 만나게 되었다. 일에 대해 고민하는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다 우연이라면 우연일지 모르나 내게는 하나하나가 다 기적으로 여겨진다. 캄캄한 어둠 속에 길을 갈 때는 몇 미터 앞도 예측하기 어렵다. 야간 산행을 할 때 앞사람 가방에 달린 희미한 불빛만 의지해 걸었던 것처럼, 한 발씩 내디뎌야 실수가 없다. 더듬더듬 걷는 걸음이지만, 모험하듯 남은 기간을 살아 보려고 한다. 이십 대 처음 직장을 찾는 내가 어설펐듯, 훗날 지금 이 길도 어설프게 보일 것이다. 그것 또한 통과해야 할 길을 마땅히 지나왔다는 것일 테니, 즐거운 마음으로 안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내게 가르쳐 주는 것들을 배우고, 진실한 마음으로 삶을 대하려 한다.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만 내 삶에 남았으면 좋겠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모두 뺄 수 있는 용기와, 진실의 눈으로 삶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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