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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Oct 16. 2023

피아 식별 완료, 검열관을 아군으로.

공개된 곳에 글쓰기가 유독 어려운 사람이 있다. 대통령 연설쯤은 못 되어도 하다못해 주례사 정도라도 된다면 부담을 가지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나, 실은 누구도 높은 기준을 요구하지 않는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잘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아 왔고, ‘정답’ 찾는 교육을 많이 받아 와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 때도 정답을 찾으려 드는 무모함을 보였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이랍시고 답을 써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글쓰기에 답이 있는 것처럼 모범 답안의 구조를 달달 외우고, 그 틀에 맞춰 글을 찍어내면 천편일률적이고 재미없는 글이 된다. 


정답이 없는 이유는, 답을 찾지 말고 만들어 가라고 그렇게 둔 것이 아닐까. 정해진 형식의 글만 써야 한다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종류가 다른 글이 있을 뿐, 맞고 틀린 글은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 유치해도 괜찮다. 맞춤법이 틀려도 괜찮다. 감정 에너지가 좀 거칠어도 괜찮다. 논리적 모순이 있어도 괜찮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올바른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들어주는 일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의 깊이를 더해 가고, 이전에 한 번도 가지 못한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쓰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한다. 


반대로 글 쓰는 게 전혀 어렵지 않은 사람이 있다. 아마 이런 분들은 갑자기 마이크를 쥐어 주고 말하라고 해도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는 부류가 아닐까. 성향상 자신을 꺼내 놓거나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 검열 기준이 높은 사람으로서는 써낼 수 없는 글을 척척 써내기도 하고,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지만 꺼내 놓기는 민망한 생각도 서슴없이 꺼내 둔다. 


두 부류를 조금씩 섞으면 참 좋겠다. 누가 섞어줄 수는 없으니 자신이 스스로 반대 방향의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게 어렵고,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조금 더 쉽게 글을 공개해도 된다. 글에는 정답이 없고, 쓰인 글은 나름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써야 한다. 글을 꾸준히 쓰면서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잘 쓴 글’에 대한 기준에 가까워져 간다. 이런 부류의 가장 안 좋은 방향은 ‘잘 쓰고 싶어서 안 쓰는 것, 그래서 못 쓰는 것.’이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발전을 가로막고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높은 표준에 이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훈련한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글을 공개해야 한다. 


최근 며칠 글을 하나도 발행하지 못했지만, 나는 글 쓰는 일 자체는 참 좋다. 발행은 못 했지만 꾸준히 글을 써 왔다. 노트에도 쓰고, 핸드폰에도, 노트북에도 꾸준히 썼다. 그런데 글을 공개하려고 하니 저항에 부딪혔다. 여전히 자기 검열관이 내부에서 힘을 잃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곰곰 생각을 하다 보니, 검열관을 무조건 무시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열관 때문에 글 써서 내놓는데 조금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그나마 검열관 덕분에 재능도 지식도 없는 내가 이만큼이라도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검열관을 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동료로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력 없는 사람이 검열 없이 아무 글이나 쓴다고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지금 써둔 글도 이따금 다시 읽으면 아쉬운 점이 한 두 개가 아닌데, 그나마 검열과정도 없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 검열관을 해치워야 할 악당으로 여기지 말고, 친구라고 생각해야겠다. 다만 검열관이 있는 이유는 글을 더 잘 쓰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검열관 때문에 한 번 생각할 소재를 두 번 생각하고, 두어 번 고치고 말 것을 세네 번 손보게 된다. 다르게 생각하니 이 녀석이 고마웠다. 최악의 경우로, 검열관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만 피하자고 생각했다. 훈련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서 발행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검열하는 성향을 받아들이되, 결국 글을 못 쓰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 내부 기준에 부합하든 아니든, 어쨌든 한 편의 글을 완성시켜 발행하는데 중점을 두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사람 성향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타고나기를 내향적인 사람이 있고, 외향적인 사람이 있다. 검열기준이 높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요즘 성향 테스트가 매우 유행하는 것을 본다. 그 와중에 심심찮게 들리는 말이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다.’ 라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원래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대로 살 것이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식이다. 그대로라면, 나같이 검열 기준이 높은 사람은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힘드니 혼자만 보는 글 위주로만 쓰거나 아니면 언젠가 쓰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글을 한 두 편 발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원래’라든지, 성향을 운운해서는 성숙을 이루기가 어렵다. 본래 가지고 태어난 성향을 알았다면, 그것을 보완해 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 성숙한 어른이요, 발전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한다.


검열이 너무 심해서 글을 발행하기 어려운 사람은 어떻게 하면 글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글을 쓰기 어렵다고 해서 ‘나는 원래 그래’하고 생긴 대로 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성향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즉,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되 반대편의 성향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지나치게 신중한 사람은 때로 과감하게 시도해 보는 연습을 해야 하고, 높은 기준에 자신을 몰아세우는 사람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졸작을 써낼 수 있어야 한다. 


생긴 대로, 나답게 사는 것이 좋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때의 나다움은 ‘나 편한 대로 살 것이니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종종 사람의 인생을 원석 형태로 비유해보곤 한다. 최초에 원석은 돌멩이의 형태를 하고 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돌멩이 상태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제련된 보석의 형태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삶을 배운다. 성숙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 원석 상태로 삶을 마치지 않고,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고 싶다. 이런 면에서 글쓰기는 그 자체로 내게 수련의 도구이며, 본성을 거스르고 훈련하는 제련의 수단이기도 하다.


글을 공개하는데 유독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글을 더 공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글을 인터넷에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공개하기 어렵고 검열기준이 높아도, 그래도 글을 공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훈련해야 한다. 괜히 검열관이랑 싸우지 말고, 검열관과 함께 훈련의 산을 올라야 한다. 글을 공개하는 것이 워낙에 쉬운 사람이라면 내용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깐깐한 검열관과 함께 글을 쓰는 사람보다 자유로울지 몰라도 가끔 불량품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써야겠다. 시시콜콜 귀찮게 하는 검열관 때문에 속도가 좀 늦어지는 단점은 있지만, 꾸준히 훈련하다 보면 언젠가 좋아지리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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