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품격

말을 세상에 내보내기 전에

by Adyton

얼마 전 T. S. 엘리엇의 시를 다시 읽었다. 특히 『네 개의 사중주』의 문장들이 내 안에 남긴 잔향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지속됐다. 그것은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보통의 감탄이나 아름다움의 여운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은 불안의 형태였다. 나는 그 감정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의 생애를 찾아 읽었다. 제1차 대전 이후의 불안과 제2차 대전의 폭격이 교차하던 시대,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언어와 신념의 경계 위에서 시를 썼던 한 인간의 삶이었다. 서로의 결핍만을 자극했던 결혼과 신앙의 전환, 시련 속에서 그는 점점 내면으로 침잠했다. 엘리엇의 동료 에즈라 파운드는 그를 “감정의 얼음 속에서 타는 사람”이라 불렀고, 그의 동시대 문인들은 이 부부의 불행을 공공연히 알고 있었다. 그의 시를 읽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삶의 무게가 그의 전기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실체를 드러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엘리엇에 대한 수많은 비평가들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내면을 분석했고, 시 속의 종교적 상징과 정신적 고통을 해석하며, 그가 왜 그런 시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정리해 두었다.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며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해석은 정교했고 표현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정작 그 속에는 엘리엇이라는 한 인간의 숨결이 없었다.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베인 작품이, 그 창작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타자의 미숙한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나는 얼음의 표면을 손끝으로 스칠 때의 냉기를 느꼈다. 도대체 비평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지나치게 쉽게 생각을 말로, 말을 글로 바꿔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손끝에서 심지어 이제는 AI를 이용해 단 몇 초 만에 완성된 문장이 전 세계인이 연결된 플랫폼으로 전송된다. 그 문장은 이미 그 자체로 말하는 자의 인격과 사유의 총합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총합을 단 한 줄로 드러내는 시대의 한가운데 서 있다. 커뮤니티의 짧은 글, 인스타그램의 캡션, 유튜브의 댓글, 뉴스 기사에 덧붙는 반응까지. 이제 ‘말하는 자’는 제한되지 않고, ‘말의 도달 범위’는 무한히 확장됐다. 오늘의 미디어 환경은 비평가의 고유 영역을 없애버렸다. 누구나 비평할 수 있고, 누구나 누군가의 말을 판단할 수 있다. 문장은 한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넘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누군가의 세계를 뒤흔드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비평은 더 이상 특정 직업군의 일이 아니다. 비평가라는 직함이 없더라도 우리는 매일 타인의 표현을 보고, 듣고, 그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말의 문턱이 낮아지거나 아예 없어지면서, 정작 사라진 것은 말의 품격이었다. 품격은 단어의 선택이나 문장의 세련됨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이전에 잠시 멈추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 말이 누군가에게 닿을 때, 그것이 설명이 될지 상처가 될지를 미리 헤아려보는 태도, 그 일시 멈춤의 감각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그래서 진정 되찾아야 할 비평의 품격이 아닐까.


나는 비평이란 본래 판단의 행위가 아니라 응답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작품이나 타인의 언어 앞에서 “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묻는 과정이지, “이것은 옳다” 혹은 “그것은 틀렸다”로 귀결되는 판결문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은 여전히 자극적인 결론으로 직행한다. 자신의 언어를 재단의 도구로 삼아 예술가의 내면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순간, 비평은 이미 폭력이 된다. 게다가 다양한 미디어에서는 심리 분석이나 정신의학적 전문성이 전혀 없는 이들이 작가의 내면을 제멋대로 해석하며 가짜 추리극 같은 ‘비평 흉내’를 빈번히 벌인다. 반면 진짜 비평가에게서는 그런 장면이 연출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쓴 문장을 세상에 내보내기 전, 반드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작품인가, 작가의 삶인가, 아니면 내 욕망과 편견인가.
내 글이 누군가의 존재를 손상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가. 비평은 본질적으로 해부의 행위이고, 해부가 섬세하지 않으면 대상은 살아남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내 문장은 상호 존중의 관점이 내재된 언어인가. 냉철함은 필요하지만 인간을 제거한 냉담함은 폭력이다.


비평의 역사에는 이 폭력의 흔적이 셀 수 없이 많다. 과거의 비평가들은 예술가의 고통을 예술의 연료로 삼았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 시간,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작가들의 작품 해설에서 ‘고통의 예술적 승화’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수도 없이 보고 들었다. 그들은 작가의 절망을 형식의 성취로 치환했고, 인간의 상처를 예술의 재료로 포장했다. 그 시절의 비평은 세련된 언어를 썼지만, 실상은 잔인했다. 그들의 눈에는 구조, 문체, 형식만이 있었고, 그 언어를 만들어낸 인간의 피와 숨은 보이지 않았다. 비평은 예술가의 인간적 조건을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지적으로 세련된 존재로 증명하려 했고, 그렇게 비평은 인간의 언어에서 가장 매혹적인 형태의 폭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폭력의 형태는 시대마다 변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 반대의 극단을 보고 있다. 도덕의 폭력이다. 냉정한 이성의 폭력이 인간을 언어에서 지워버렸다면, 뜨거운 도덕의 폭력은 인간의 복잡함을 한 줄짜리 윤리 잣대로 잘라내 버린다. 어떤 작품은 작가의 과거 발언 하나로 금지되고, 어떤 예술가는 단 한 장면의 불쾌함 때문에 사회적으로 낙인찍혀 버린다. 윤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윤리가 예술의 해석 전체를 점령할 때, 우리는 다시 폭력의 문턱에 서게 된다. 비평의 본질은 판단이 아니라 이해에 있고, 이해에는 반드시 거리가 필요하다. 거리가 사라지면 우리는 타인 안으로 침입하고, 거리가 지나치면 타인을 박제해 버린다. 진짜 비평가는 그 온도와 거리를 섬세하게 감지하는 사람이다. 그는 말을 던지기 전에 먼저 듣고, 해석하기 전에 기다릴 줄 알며, 해체한 후에는 완벽에 가깝게 재구성한다.


비평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완전한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장은 한 사람의 기억과 경험, 감정과 사유의 궤적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진짜 숙련은 객관을 가장하는 무표정함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을 끝까지 응시하고 그것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용기에 있다. 좋은 비평가는 자신이 쓰는 문장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완전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 언어는 닫히고, 닫힌 언어는 더 이상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 그래서 비평가가 쓸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문장은 “나는 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고백일 것이다. 그것은 무능의 표명이 아니라, 타인과 예술에 대한 가장 겸허한 존중의 표현이다. 그 존중은, 언어가 멈추어 서야 할 곳을 아는 지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비평의 품격은 문체의 세련됨이나 지식의 넓이에서 오지 않는다. 멈추어 묻는 시간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내가 던지는 문장이 세상을 냉철하게 밝히는 불빛이 될지, 누군가의 마음을 겨누는 칼날이 될지는 글을 쓰기 전의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 세상에 글을 내보내기 전에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의 언어가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정중히 문을 두드리는 행위인가,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작가를 상처 입히는 폭력의 수단인가.”

그 질문에 대한 올곧은 대답이 깃든 언어만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타인의 마음속에서 다시 읽히는 비평의 말로 살아남을 것이다.


*Cover Image: T.S. Eliot by Walter Stoneman

half-plate glass negative, January 1948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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