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해주고 싶은 위로의 말
나의 조급증과 쓸데없는 걱정은 나 스스로를 어려움에 빠뜨리곤 한다. 남과의 비교에 한없이 작아지는 나는 이렇게 학습되어 몇십 년을 살아왔다. 쉽게 바뀌어지지 않으리라. 내 나이 올해로 앞자리가 바뀌었다. 39살이 되던 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30대 후반의 나를 상상했을 때 지금의 이 모습이 아니었다. 내 미래의 일기 안에 나는 빌딩 건물주에 포르쉐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멋쟁이 아줌마였다. 현실은 평범한 아이 둘의 엄마이자 가정주부. 한때는 플로리스트라 불리는 직업을 가지고 나름 커리어를 쌓고 우아한 척 고상한 척하는 나였다. 그렇게 나는 다른 사람의 눈이 중요해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로 남들이 보기에 좋은 것들로 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꽃을 좋아하고 손재주가 있어 무엇이든 곧 잘 흉내 내고, 무슨 일이든 부딪쳐서 해결하는 막무가내 성격, 좋게 말하면 추진력이 좋아. 일을 잘 이어갔다. 나름의 자신감은 덤이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웨딩 의뢰가 들어왔을 때도 어떻게든 예쁘게 하면 되니까 장식의 순서나 방법 따위는 나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나를 믿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꾸며주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항상 욕심이 가득이고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적자에도 불구하고 돈 신경 안 쓰고 손님한테 받은 돈을 털어 예쁘게 장식하고 정작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이 한 푼 없이 끝나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하니 흥미를 잃어버렸다. 일을 시작한 계기가 경제적 독립을 꿈꾸었고 아이 둘의 엄마인지라 어린아이들은 학교에 유치원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게 하고 나에게 남은 것들은 허무함 뿐이었다.
매사 긍정적인 성격 때문에 모든 게 잘 될 거라 생각했지만 꽃은 그저 나의 노동력을 고스란히 갈아 나에게 남는 건 돈이 아니라 피곤과 스트레스뿐이었다. 마치 남들이 보기엔 우아하게 떠 있는 오리 같았다. 새벽시장 다녀와 아이들 학교 보내고 그 와중에 식물 택배 사업을 시작해서 손톱에 흙이 때처럼 끼고 선인장 가시가 손에 박혀 아픈 날이 매일 이었다.
그렇게 남들에게 말하기 좋은 플로리스트란 직업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우리 가게 자리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고 부동산 사장님을 통해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아무 생각 없이 힘든 노동을 계속하던 찰나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쑥 들어왔다 기회다. 거기다 권리금까지 넉넉히 준다니 초기 자금을 뽑고도 남는다 생각하니 미련이 없어졌다. 그러고 나서 코로나가 터졌다. 우연히도 사업이 정리되고 아이들을 챙겨 줄 수 있어 행복했다.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문득 나의 존재가 한없이 하찮아 보이고 쓸모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마흔이 되고 나니 일기장에 썼던 내가 자꾸만 기억 속에 소환이 되고 나는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갑자기 마흔에 진로 찾기? 적성 찾기를 하자니 너무 늦은 것만 같고, 방법도 모르고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너무 크기만 하다.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지 몰라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어보자.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운동과 독서 육아뿐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방황하고 그런 나를 위해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불혹은 세상일에 흔들려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라는데 여전히 갈팡질팡 하고 있다. 내가 하려고 노력하는 건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지길 노력하는 일. 그것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사랑스럽고 안쓰럽다.
코로나로 인해 내가 얻은 것이 하나 있다면 투닥투닥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 일하면서 항상 미안했었는데.. 코로나로 몇 년의 시간 동안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다.
그리고 올해 목표가 있다면 미래의 나에게 한 발짝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싶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도전하는 내가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