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리얼리즘
얼마 전 미용실에 갔다. 그곳은 대리석과 스테인리스 같은 금속 재질로 꾸며진, 뭔가 미드센추리 풍의 공간이었다. 한구석에 오브제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풍선으로 만든 강아지 모양이었다. 스탠더드 푸들 같았다. 그때는 그냥 '이 인테리어랑 잘 어울리는 오브제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시뮬라시옹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그 과정에서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시뮬라시옹이 가짜가 진짜를 흉내 내는 과정이라면 그 과정이 끝까지 달렸을 때 도착하는 결과가 바로 하이퍼리얼리즘이다.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눈에 보인다.
처음에는 모든 것에 원본이 있었다. 디자이너가 직접 그린 그림이나 작가가 직접 쓴 글처럼, 누군가의 생각과 노력이 담긴 진짜 실재(Existence)가 있었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이 실재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짜와 똑같이 복사하는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복제물들은 원본보다 더 예쁘고, 더 선명하며, 더 완벽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이 시뮬라시옹 과정이 무서운 이유는 어느 순간 가짜들이 원본을 앞질러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투박한 진짜보다 화려하게 가공된 가짜 이미지에 더 열광하기 시작한다. 맛있는 음식의 실제(Fact) 맛보다 사진 속에 담긴 먹음직스러운 색감에 먼저 반하고 사람의 체온이 담긴 디자인보다 AI가 계산해 낸 완벽한 비율의 디자인을 더 진짜답다고 느끼게 된다.
이렇게 가짜가 진짜보다 더 매력적이고 강력해져서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진 상태, 이게 바로 하이퍼리얼리즘(초실재)이다.
결국 하이퍼리얼리즘의 세계에서는 원본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짜 이미지들이 우리 삶이 된다. AI가 만든 디자인이 인간의 디자인보다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워 보일 때 우리는 이미 시뮬라시옹의 파도를 타고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거대한 환상 속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하이퍼리얼리즘의 대표 작가로 제프 쿤스와 론 뮤익이 나왔다.
제프쿤스의 대표작 중의 하나는 벌룬 독(Balloon Dog)이라고 한다.
'벌룬 독?'
이미지를 찾아보니 미용실에서 봤던 그 오브제였다.
'와, 무심결에 봤던 저게 하이퍼리얼리즘을 담은 작품이었어?'
물론 오마주겠지만. 어쨌든.
벌룬 독은 우리가 어릴 적 파티장에서 보던 금방 터져버릴 듯한 가벼운 강아지 풍선의 형태를 빌려왔지만 실제로는 수 톤 무게의 딱딱한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다.
벌룬 독은 진짜 강아지를 흉내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 고무풍선도 아니다. 강아지의 귀여움과 풍선의 질감이라는 기호들만 빌려와서 세상 그 어떤 강아지나 풍선보다 더 매끈하고 완벽하며 비싼 존재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숲 속에서 뛰어다니는 진짜 강아지의 모습보다 미술관 조명을 받아 완벽하게 반짝이는 벌룬 독의 매끄러운 표면에서 더 강렬한 아름다움의 실재를 느낀다.
또 한 번은 대통령 선거 후 청와대 방문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어 부랴부랴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던 적이 있다. 열심히 청와대의 모습을 보고 돌담길을 내려오면서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렀다. 거기서 론 뮤익의 전시회를 볼 수 있었다.
전시 작품들은 사람의 피부 모공, 솜털, 핏줄까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이 재현했고 크기도 이질감을 주었다. 론 뮤익의 조각은 실제 사람보다 엄청나게 크거나 반대로 아주 작았다. 미술관에서 본 그 거대한 여성이나 남자의 얼굴은 '진짜 사람'보다 더 진짜처럼 생겼고 크기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작품을 보면서 '우와, 진짜 사람 같다'라고 느끼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 작품이 너무 완벽하고 강렬해서 옆에 서 있는 진짜 사람이 가짜처럼 보이고 초라해지는 경험을 했다.
완벽하게 가공된 가짜가 실재를 압도하는 세상. 원본 없는 가짜가 현실을 지배하는 하이퍼리얼리즘.
이처럼 완벽하게 가공된 가짜가 실재를 압도하는 세상 원본 없는 복제본이 현실을 지배하는 하이퍼리얼리즘은 디자이너가 되려는 나에게 매일 마주하는 현실 같다. AI가 수조 개의 데이터를 조합해 1초 만에 가장 완벽해 보이는 결과물을 뿌려대는 지금 우리는 어쩌면 디자이너의 영혼이라는 원본이 거세된 시뮬라크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서늘한 현실 끝에서 나는 현대 미술이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을 마주한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란 예술가의 평범한 변기를 전시장으로 가져와 "샘"이라 이름 붙였을 때, 대중은 현대 미술의 모호함과 난해함에 당혹감을 느꼈다.
"이게 왜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현대인들을 예술과 점점 동떨어지게 만들었다. 나 역시 배경지식 없이 마주했던 론 뮤익의 작품 앞에서 그저 기술적인 정교함에 감탄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시뮬라시옹과 하이퍼리얼리즘의 맥락을 짚어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현대 미술의 난해함은 우리에게서 멀어지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믿어왔던 실재에 대해 멈춰 서서 질문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제프 쿤스의 반짝이는 강아지가 진짜 풍선보다 더 진짜처럼 보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소비하는 이미지의 허상을 목격한다. 론 뮤익의 거대한 인간 조각 앞에서 초라해지는 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를 감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잘 만든 가짜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설계한 세계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과정이다.
결국 디자이너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화려한 기술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대상이 품고 있는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가늠해 보는 집요한 관찰의 힘인 것 같다. 제작자가 어떤 의도로 이 시뮬라크르를 창조했는지, 그 이미지가 대중에게 어떤 기호로 소비되길 원하는지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AI가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단단한 디자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관찰의 힘을 기르기에 현대 미술이 좋은 선생일 수도 있다. 난해하다는 이유로 기피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오히려 그 모호함은 우리를 밀어내기 위한 장벽이 아니라 더 깊이 들여다보라는 작가의 초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둘러 시선을 거두기보다 그 낯선 형태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사유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낯섦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오랜 시간 공들여 바라볼 때 비로소 껍데기 너머에 숨겨진 작가의 치열한 고민과 진심이 읽히기 시작한다. 그 순간 멀게만 느껴졌던 예술은 비로소 나만의 애정 어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멈춰 서서 관찰하는 것
진짜 생각을 하는 디자이너로 남기 위해서, 또 예술을 진심으로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도 나는 이 사소한 시도를 해보려 한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이것이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강력한 도구가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