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은 흉내 낼 수 없는 불량품의 가치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 언덕 배티뇰 가의 선술집 투르 솔페리노.
밖에서는 오스만 남작의 파리 대개조 사업으로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이 들려왔고 공사의 먼지로 길가는 사람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마네는 거칠게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모네에게 르블랑 씨의 편지를 내던졌다.
"이것 좀 보게, 모네. 르블랑 씨 알지? 그 신흥 부르주아 같은 자들이 저 파괴된 땅을 헐값에 사들여 뭘 하려는지 아나? 집은 고딕, 실내바닥은 오리엔탈, 정원은 그리스식이라네. 그리고 자기 초상은 르네상스식으로 그려달라고 하지. 돈으로 시대를 쇼핑하는 셈이야.”
19세기 중반의 파리는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도시의 형태가 바뀌었고, 계층이 바뀌었고, 취향이 바뀌었다.
그때 선술집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무리의 화가들이 절망 섞인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제 끝났어. 건너편 사진관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봤나? 화실에서 한 달을 매달려야 하는 초상화를 저 기계는 단 몇 분 만에, 그것도 우리보다 훨씬 정확하게 찍어내더군."
그동안 많은 화가들은 사실적인 재현 능력을 생계의 기반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새 기술이 그 일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버렸다. 지금의 우리들 모습처럼.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지?”
모네 역시 저들의 말에 고개를 숙였지만 마네의 시선은 달랐다.
“사진이 정확하게 기록해 준다면 우리는 굳이 똑같이 그리려 애쓸 필요가 없지 않겠나? 모네, 사진은 재앙이 아니라 기회일지도 몰라. 저 기계가 똑같이 그리는 노동을 대신해 준다면 우린 이제 재현의 의무에서 해방되는 거라네. 굳이 르네상스식의 가짜 입체감을 만들려 애쓸 필요 없어. 사진이 보여주는 저 평면적인 찰나. 저게 진짜 우리가 보는 세상이 아닌가?"
당시 미술계의 아카데미는 강력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재는 반드시 신화나 역사여야 했고 기법은 붓 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묘사를 지켜야 했다. 아카데미는 이 보편성을 울타리 삼아 그 밖의 시도를 근본 없는 오류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 견고한 성벽 안의 화가들도 사실 속으로는 떨고 있었다. 도제식 시스템으로 지위를 독점해 왔지만 사진이라는 불청객은 그들의 밥그릇을 위협했다.
위기감을 느낀 아카데미 화가들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살롱전을 더욱 성대하게 열었다. 살롱전은 이제 예술의 장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네 역시 자신과 생각을 같이한 이들과 함께 살롱전에 도전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심사위원들에게 마네의 거친 붓질과 일상의 소재는 신성한 예술에 대한 모독이자 파괴되어야 할 불량품에 불과했다. 그들은 마네를 철저히 조롱하며 문밖으로 내던졌다.
1863년, 살롱전에서 대거 낙선 사태가 벌어졌다. 논란이 커지자 나폴레옹 3세는 낙선작을 따로 전시하도록 허용했다. 그것이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이다. 마네의 작품도 그곳에 걸렸다.
낙선전에 몰려온 일반 대중들은 마네의 그림 앞에서 기본도 모르는 못 그린 그림이라며 비웃었다. 그들의 눈 역시 오랜 시간 아카데미가 주입한 보편적 기준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점이 바로 반란의 시작이었다.
마네와 동료들은 확신했다.
과거의 유령 같은 보편적 기준에 매달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게으른 방식이라는 것을. 그들은 비웃음을 견디며 스스로 낙선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직업을 위협하던 새 시대의 기술.
일부 화가들이 더 정교한 묘사로 사진과 경쟁하려 했던 것과 달리 마네는 사진이 제시한 평면성과 순간성에 주목했다. 형태를 매끄럽게 완성하는 대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장면의 감각과 빛의 분위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다른 방향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 선택이 이후 인상주의로 이어지는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