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을 욕하면서 살롱에 매달린 마네
"야, 이번에 독일 전시회 가서 보니까 걔네는 우리처럼 안 하더라고. 보고 체계도 다르고 협업 툴 쓰는 것도 차원이 달라. 우리도 이거 도입하면!"
해외 연수에서 돌아온 마 과장은 상기된 얼굴로 기획안을 올린다. 자신이 본 그 세련된 시스템을 우리 조직에 이식해 혁신 담당자로 인정받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 과장아... 알겠는데 될 것 같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찍힐까 걱정스럽다."
기획안이 반려된 그날 저녁 퇴근길 소주 한잔에 김 과장의 분노가 섞여 나온다.
'답답하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렇게 경직되어 있단 말이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하는 건지. 에이, 내가나 가서 차리던지 해야지."
우리는 매일 조직의 구태의연함을 욕하며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욕하던 조직의 문법에 우리는 이미 십수 년간 길들여져 있고 내심 누군가 나를 조직에서 인정받는 인재로 발탁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시스템을 혐오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정점에 서고 싶다.
프랑스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
열여덟 살의 마네는 보수적인 거장 쿠튀르의 화실에서 6년을 견디며 수련한다. 그는 누구보다 정교하게 고전의 문법을 익혔으나 동시에 그 경직성에는 진저리를 쳤다. 스승은 매끈한 마감과 정해진 구도를 강요했지만 마네는 모델의 자연스러운 숨결을 담고 싶어 했다. 시스템을 완벽히 파악하면서도 그 시스템이 담지 못하는 '현장의 진실'을 고민하던 반항아 신입사원이었던 셈이다.
당시 사진술은 이미 사물의 형태를 거울처럼 베껴내며 화가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마네는 재현이 이제 기계의 몫임을 깨닫고 화가는 인식을 그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과감히 독립한다.
그리고 그는 루브르에 있는 벨라스케스의 회화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다. 거장은 사물이 가진 고유의 색(고유색)에 집착하지 않고 주변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색의 관계를 대담한 붓질로 요약하고 있었다. 마네는 여기서 복잡한 명암의 중간 단계는 노이즈일 뿐이며 강렬한 대비와 생략이야말로 빛의 진실을 전달하는 가장 현대적인 방법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1861년 이 낯선 데이터가 담긴 <스페인 가수>가 살롱에 입선하며 그는 처음으로 조직의 인정을 맛본다.
2년 뒤 마네는 3개의 작품을 살롱에 출품했으나 모두 낙선하고 만다. <풀밭 위의 점심>은 낙선작 중 하나인데 그해 열린 낙선전(Salon des Refusés)에 전시되어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다. 못 그렸다는 비판을 받은 것이다. 이전시대의 작품과 비교하면 여성의 미적 부분을 상당히 생략했으며 신화적이지 않은 존재로 표현하기도 하는 등 당시 정서와는 맞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마네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강렬하게 각인시킨 작품 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비판을 의식하여 같은 시기에 그림을 그렸으나 바로 공개하지 않고 2년을 묵힌 뒤 <올랭피아>를 내놓으나 결과는 여전히 처참했다.
마네는 사진이 흉내 내는 가짜 입체감(명암의 단계)을 과감히 삭제하고 화면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비평가들은 이를 미완성된 납작한 그림이라 조롱했다. 그는 시스템이 요구하는 매끈한 보고서 - 전통회화는 음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 가 아닌 빛이 망막에 닿는 그 찰나의 평면적 데이터를 정직하게 기록했으나 조직은 이 혁신을 성의 없는 불량으로 규정했다.
비난을 피해 떠난 스페인 연수에서 그는 확신을 얻는다. 빛은 순식간에 변하기에 수십 번 덧칠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밑색이 마르기 전에 단숨에 색을 얹는 알라 프리마(Alla Prima) 기법을 - 이전에는 밑색이 완전히 마른 뒤에 위에 색을 칠했다 - 완성한다. 그 결과물인 <피리 부는 소년>은 배경과 원근감을 지우고 인물이라는 핵심 데이터만 남겼다.
이는 사물을 입체가 아닌 색 면의 덩어리로 인식하기 시작한 작품이었다.
보불전쟁 참전은 그의 눈을 완전히 바꾼다. 참호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마네는 화실 안의 조명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절감했다. 제대 후 그는 모네 같은 후배들의 외광파(Plein air) - 야외에 나가 빛이 들어오는 풍경을 그리는 - 감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중후한 블랙을 버리고 눈부신 태양 아래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반사를 캔버스에 담았다. 후배들의 유연한 방식(현장 중심 데이터)을 받아들여 자신의 업무 톤을 화사하게 수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상파 후배들은 8번이나 독립 전시회(스타트업) 합류를 제안했지만 마네는 모두 거절한다. 그에게 진정한 승리는 시스템 밖의 자유가 아니었다. 자신을 거부한 그 본사(살롱) 안에서 정점으로 인정받는 것. 그것이 목표였다. 욕하면서도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마네는 끝까지 살롱의 문을 두드렸다.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1881년 마네는 그토록 갈구하던 조직의 공식적인 인정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마침내 거머쥔다. 욕하면서도 매달렸던 시스템이 드디어 그를 명예로운 인재로 승인한 것이다. 하지만 마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1882년 그는 자신의 커리어 전반을 압축한 최후의 대작 <폴리 베르제르의 바>를 살롱에 전시한다.
거울에 비친 왜곡된 뒷모습은 실제의 복제가 아닌 관찰자의 시선과 빛에 의해 재구성된 주관적 진실을 담고 있었다. 훈장이라는 시스템의 징표를 가슴에 달고서도 그는 끝까지 사진이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시각 데이터를 캔버스에 증명해 보였다.
마네는 1883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많은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전 세대부터 전통을 흔들려는 시도들은 이어지고 있었다.
마네 역시 그 연속선 위에 서 있었다. 다만 그는 기존 문법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그 안에서 미세한 균열을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명암을 줄이고, 입체를 압축하고, 시선을 정면으로 맞대는 작은 차이들.
그 작은 차이들이 이후 다른 화가들에게 이어졌고 새로운 흐름을 낳았다.
사진이 재현을 위협하던 시기에 그는 사진과 경쟁하려 하지 않고 회화만이 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냈다.
기존 문법 속에서 기술과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 틈을 밀어 넣었다.
새로운 기술이 밀려올 때 모두가 휩쓸려 나가는 것 같지만 어떤 사람은 남아서 안으로 부터의 변화를 도모한다.
마네는 그런 사람에 가까웠다.